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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1209
성명
한자 趙占煥
이명 趙松熙, 趙點煥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애족장
목포상업학교 졸업생으로 1929년 11월 19일 목포에서 목포상업학교(木浦商業學校) 학생(學生)을 이끌고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日警)검거(檢擧)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목포청년동맹(木浦靑年同盟)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1년 7월과 8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목포연화대회(木浦煙火大會) 격문(檄文)사건으로 잠시 검거(檢擧)되었다가 석방되었고1932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의 후계조직으로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등을 조직하고 전남(全南) 목포(木浦)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를 결집하여 민족의식과 농민의식을 형성하는 등 활동하다가 1934년 5월 중순 목포 격문 사건(木浦檄文事件)으로 잠시 검거(檢擧)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35년 8월 체포(逮捕)되어 징역 1936년 2년 6월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르고 33세로 요절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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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목포상업학교(木浦商業學校) 출신으로 1929년 11월 초 광주(光州)에서 학생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목포상업학교 학생을 지도하며 광주지역 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목포청년동맹(木浦靑年同盟)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1년 7월과 8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목포연화대회(木浦煙火大會)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구금되기도 했다.

1932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후계조직으로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등을 조직하고, 전남 목포지역의 농민·노동자를 결집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1934년 5월 중순 목포격문사건(木浦檄文事件)으로 구금된 바 있으며, 1935년 8월 다시 붙잡혀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총 네차례 일경에 구금되었으며, 3년여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朝鮮日報(1931. 7. 14, 1936. 1. 29)
  • 4. 14·5. 27·12. 6, 1936. 3. 24)
  • 判決文(木浦地方法院, 1936. 3. 20)
  • 東亞日報(1930. 1. 9·3. 4·3. 10·3. 15, 1931. 7. 12·8. 1·9. 9·9. 17·9. 28, 1934. 3. 22·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조점환 조점환(趙點煥), 조송희(趙松熙) 전남 목포 -
본문
1907년 7월 16일 전라남도 목포(木浦)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조점환(趙點煥)과 조송희(趙松熙)를 썼다. 1928년 3월 목포상업학교(木浦商業學校)를 졸업하고, 1929년 5월 사립일본대학 전문부경제과에 입학해 일본에서 여러 활동을 하다가 1929년 11월 목포로 돌아왔다. 이후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목포상업학교 학생들과 동조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1930년 2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김상원(金相元)·이상원(李尙源)·양재용(梁在容)·이병우(李丙佑) 등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을 받고 공판에 회부되었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1927년 10월 이병우·김상원·최창호(崔昌鎬) 등과 함께 사회과학서적을 연구한다는 명목 하에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1929년 4월 최창호·김상원 등과 함께 재차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가 5월에 해산하였으며, 최창호 등과 함께 다른 학생들을 선동하여 민족차별, 일본인 교사 배척 등을 표방하는 동맹휴교 감행을 논의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공판 시작과 함께 목포형무소에서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30년 3월 7일 어머니가 아들의 옥고를 통분해 우물에 투신하여 사망하기도 하였다. 1931년 목포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7월과 8월 목포에서 발생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목포연화대회(木浦煙火大會)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붙잡혔다가 같은 해 9월 24일 풀려났다. 만보산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의 충돌 사건으로 일제 측의 선동과 은밀한 이면 공작이 있었는데, 당시 목포 시내에 만보산사건의 진상과 일제 침략정책의 본질을 알리고 학생들의 동맹휴업을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했던 것이다. 1932년 목포 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를 결집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후계조직으로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등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이 같은 조직의 변화는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와 함께 지식인 위주의 공산당 건설 방식에 대한 반성과 아래로부터의 당 결성 추진 등 사회주의 운동의 변화와 연계되는 것이다. 1934년 5월 목포격문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구금생활을 하였고, 1935년 8월에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1936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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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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