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상업학교 졸업생으로 1929년 11월 19일 목포에서 목포상업학교 (木浦商業學校) 학생 (學生) 을 이끌고 광주학생운동 (光州學生運動) 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 (日警) 에 검거 (檢擧) 되어 수개월간 옥고 를 치렀으며 이후 목포청년동맹 (木浦靑年同盟) 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1년 7월과 8월 만보산사건 (萬寶山事件) , 목포연화대회 (木浦煙火大會) 격문 (檄文) 사건으로 잠시 검거 (檢擧) 되었다가 석방되었고1932년 전남운동협의회 (全南運動協議會) 의 후계조직으로 공산주의자동맹 (共産主義者同盟) 등을 조직하고 전남 (全南) 목포 (木浦) 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를 결집하여 민족의식과 농민의식을 형성하는 등 활동하다가 1934년 5월 중순 목포 격문 사건 (木浦檄文事件) 으로 잠시 검거 (檢擧) 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35년 8월 체포 (逮捕) 되어 징역 1936년 2년 6월을 받아 옥고 (獄苦) 를 치르고 33세로 요절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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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경(日警) : 일제 경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목포상업학교(木浦商業學校) 출신으로 1929년 11월 초 광주(光州)에서 학생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목포상업학교 학생을 지도하며 광주지역 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목포청년동맹(木浦靑年同盟)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1년 7월과 8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목포연화대회(木浦煙火大會)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구금되기도 했다.
1932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후계조직으로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등을 조직하고, 전남 목포지역의 농민·노동자를 결집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1934년 5월 중순 목포격문사건(木浦檄文事件)으로 구금된 바 있으며, 1935년 8월 다시 붙잡혀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총 네차례 일경에 구금되었으며, 3년여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朝鮮日報(1931. 7. 14, 1936. 1. 29)
- 4. 14·5. 27·12. 6, 1936. 3. 24)
- 判決文(木浦地方法院, 1936. 3. 20)
- 東亞日報(1930. 1. 9·3. 4·3. 10·3. 15, 1931. 7. 12·8. 1·9. 9·9. 17·9. 28, 1934. 3. 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