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다.
1903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주한인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인의 미주 이주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이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때 안재창도 미주로 이주하였다. 당시 한인이주자들은 힘겨운 생활을 영위했으나, 조국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뜨거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7년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안재창도 이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럼에도 국운이 기울어지게 되자 미주지역에서는 독립전쟁에 대비한 사관양성의 군사운동이 일어나게 되니, 1909년 박용만(朴容萬)이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가 그것이었다. 재미 유학생을 비롯한 한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계학교 체제로 운영되었던 한인소년병학교는 3년 과정으로 1914년까지 6회에 걸쳐 100여 명의 사관생도를 배출하였다. 그는 군사양성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재정자금이 필요하였는데, 안재창은 이같은 재정자금을 지원하고자 유지단(維持團)을 조직하여 한인소년병학교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디트로이트 지방의 한인사회를 이끌면서 1929년 동지회 디트로이트지회, 1942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디트로이트 지방회 등을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구미위원부 재정보고(1926년 9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1930년 9월 발행) 2·7·12·21·23·28·39·44·45·48面
- 新韓民報(1910. 11. 30, 1919. 1. 23, 4. 22, 4. 23, 5. 29, 1925. 2. 5, 1929. 5. 14, 1942. 1. 8, 1. 22, 3. 12, 3. 26, 4. 30, 6. 18, 8. 13, 11. 22, 12. 3, 12. 31, 1943. 1. 2, 1. 14, 3. 18, 6. 3)
- 共立新報(1907. 6. 14, 7. 10)
- 동지식산회사 재정보고(1925년 1월부터 1930년 10월까지)
-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독립운동 의연록 17面
- 國民報(1914. 2. 21)
- 태평양주보(1941.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