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정규영은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 등 유림의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유교계는 3.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
운동을 계획했다.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다. 1919년 기독계와 불교
계가 주동한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교계는 대대적인 장서운동을 일으
켜 이에 호응하기로 했다. 호서지방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서한 준비
를 할 때, 영남지방 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도해 추
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
(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
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이로써 전문 2천 674자에 달하
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게 된 것이다. 장서는 임시정
부에 전달되고 이것은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전해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문 원본과 같이 3,000부를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유림 대표들의 독립청원운동은 4월 2일 경북 성주의 만세
시위 때 일본경찰에 체포된 유생들에 의해 사건이 발각되었다. 그러나 이들이완강히 비밀을 지켰기 때문에 활동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고 곽종석 등 20명만
노출되어 체포당했다. 후에 상해에서 각 고을 향교로 발송한 한문 본 청원서가
발각됨으로써 137명의 이름이 알려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68) 제4권 255~257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8권 931~936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5) 제7권 665~673면
- 俛宇集(郭鍾錫, 1984) 四 762면
- 韓齋集(鄭奎榮, 1943) 卷之八 67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