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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960112
성명
한자 金會鍾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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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6 훈격 건국포장
1896년 경북(慶北) 의성(義城)에서 거의(擧義)의병장(義兵將) 김상종(金象鍾)의 동생으로 의진(義陣)에 참여하였고 1900년 의병거사 초부터 해산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기록한「망금성백오십운(望金城百五十韻)」을 집필하여 당시의 창의내용을 소상히 후세에 전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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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김회종은 1896년 경북 의성에서 거의한 김상종(金象鍾)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의성에서는 유림 김상종에 의해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김회종은 김상종의 동생으로 김상종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김상종 의병부대는 거의 직후인 1896년 2월 구성산전투(九城山戰鬪)와 청송(靑松)전투, 감은(甘隱)전투, 산운천변(山雲川邊)전투 등에서 적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의성 출신의 인사인 김하락(金河洛)이 남한산성에서 기의한 후 의성에 이르렀을 때, 이들과 의진을 합하여 적군과 싸웠다. 또한 김상종 의병부대는 인근 안동의 김도화(金道和)·영양의 김도현(金道鉉)·진보의 허훈(許薰)·선성의 이인화(李仁和) 의병부대들과 서로 호응하면서 연합전선을 이루며 전투를 전개했다.

그는 이러한 김상종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적군과 전투를 치르는 등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0년에 의병거사 초부터 해산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망금성백오십운(望金城百五十韻)」을 집필하여 당시 창의내용을 후세에 소상히 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義얼의 메아리(中外出版社, 1983) 58面
  • 望金城百五十韻(金會鍾, 筆寫本, 190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회종 자 : 원미(元美) 경상북도 의성(義城) -
본문
1852년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서변리(西邊里) 사촌(沙村)에서 아버지 김수익(金壽翼)과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원미(元美)이다.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후손으로, 대지주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정재학파(定齋學派)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형은 의병장 김상종(金象鍾)이다.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성지역에서는 1896년 3월 3일 향교에서 창의 통문을 돌리고, 3월 13일 향회를 열기로 하였다. 바로 그날 아침 의성군수 이관영(李觀永)이 안동 의병부대에 잡혀가는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단발한 개화 군수로, ‘대구관찰사 이중하(李重夏)의 무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향회에서 군수를 구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신한종(申漢宗)·이동필(李東弼)과 함께 안동 의병부대를 찾아가 군수 구출을 위한 변론을 하다가 오히려 곤욕을 치렀다. 다음날 3월 14일 이돈유(李敦裕)·권대직(權大稷)이 파견되어 군수의 무죄를 호소하며 구출하려 하였지만, 군수는 결국 3월 17일 안동 의병부대 중군영(中軍營)에게 제남루(濟南樓)에서 처형되고 말았다.창의가 늦어진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한 의성 유림들은 급히 창의를 서둘렀다. 예정보다 하루 늦은 3월 14일 향교에서 향회를 열고 김상종을 의병장으로 천거하였다. 김상종은 이를 수락하고, 3월 25일 의병장에 취임하여 부대의 진용을 갖추었다. 대장 아래 중군장, 선봉장, 소모장, 관향장(管餉將)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때 아들과 함께 백의종군으로 형을 보필하며 의진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1896년 4월 1일 관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후 3시경 의성 구봉산(九峰山)에 진을 쳤다. 이튿날 관군의 공격으로 접전이 이루어졌는데, 오전 5시경부터 오후 1시경까지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관군 20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의진은 황산(黃山)에 머물렀다. 같은 해 5월 10일 다시 관군이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대비하였다. 하지만 밤부터 이튿날까지 큰 비가 내려 무기와 장비가 젖어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관군의 공격으로 의병 27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부대는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김하락(金河洛)의 이천 의병부대와 심성지(沈誠之)의 청송 의병부대에 요청하여 청송 안덕(安德)에서 3진 연합을 이루었다. 1896년 5월 14일 대구 관군이 몰려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천 의병부대가 이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였다. 이날 오전 12시경 관군이 성황현(城隍峴)으로 들어오자 매복해 있던 이천 의병부대가 일제히 사격하여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격퇴시켰다. 관군은 다시 안덕면(安德面) 감은리(甘隱里) 뒷산으로 공격해 왔다. 이 전투에서 3진은 관군 7~8명을 사살하며 물리쳤다.감은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 청송의병부대와 결별하고, 이천 의병부대 함께 의성군 사곡면(舍谷面) 운곡(雲谷)을 거쳐 5월 18일 의성군 금성면(金城面) 수정사(水淨寺)로 옮겨 연합부대로 군사를 정돈하였다. 새로 모여든 군사 100여 명을 재편성하며 의기를 떨쳤다.5월 20일 남쪽 산운리(山運里) 쪽에서 관군 200여 명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부대를 나누어 비봉산(飛鳳山) 주위와 남현(藍峴)을 지켰다. 그날 오전 12시경 수정동(水淨洞)으로 들어오는 적군을 청로역(靑路驛) 방면으로 격퇴시키고 추격하여 가음면(佳音面) 순호리(蓴湖里)의 안산 등지에서 다시 격퇴시키고 수정사로 회진하였다.또 5월 24일과 25일 다시 공격해 온 관군을 산운천변(山雲川邊)에서 5명을 사살하며 격퇴시켰다. 5월 26일 이천 의병부대가 비봉산을 넘으려 하자 갑자기 서울 관군이 공격해 왔다. 거센 돌풍으로 전투가 어렵게 되자 대장을 부축하여 비봉산에서 내려와 춘산면(春山面) 사미(思美)에 도착하였다. 이때 대장은 “헛되이 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또한 맨손으로 행진하는 것도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하며 각자에게 해산을 명하였다.의성 의병부대의 진중일지인 『병신창의실록(丙申倡義實錄)』을 남겼다.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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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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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병신 창의 기적비 경상북도 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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