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박문호는 1928년 7월 1일부터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청년동맹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8월 11~12일 동래실달야학(東萊悉達夜學) 강당에서 열린 동래노동조합 결성했으며, 집행위원회 정치문화부를 맡았다.
1929년 3월경 중국으로 건너갔다. 5월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김두봉(金枓奉)의 소개로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단원 박건웅(朴建雄)을 소개받았다. 당시 의열단은 베이징(北京)에 있었다. 9월 박건웅의 주선으로 베이징 화베이대학(華北大學)에 들어갔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에 가입했다.
11월 김원봉·안광천(安光泉) 등이 결성한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産黨再建同盟)에 참여하여 화베이대학 야체이카에 활동했다. 정해로(鄭海魯) 등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받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0년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북평지부(北平支部) 선전부(宣傳部) 책임을 맡았다. 4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업으로 베이핑(北平) 서성(西城) 동4조(東四條) 호동(胡洞)에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했다. 안광천·김원봉 등과 한인 청년들을 독립운동가로 양성하여 국내 서울·부산(釜山) 등지에 파견했다. 박문호의 여동생 박차정(朴次貞)도 레닌주의정치학교에서 수학한 인사였다. 박차정은 국내 근우회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그녀는 1930년에 중국에 가서 레닌주의정치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1931년 12월 14일 박문호와 김강잠(金剛潛) 등은 톈진(天津)의 프랑스조계(佛租界)에서 톈진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2개월 동안 취조를 받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었다. 1932년 6월 1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長崎地方裁判所)에서 ‘업무상 횡령(橫領) 및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그에게 횡령죄가 적용된 내막은 이랬다. 박문호는 1924년 이후 동래군청(東萊郡廳) 산하 동래누룩조합(東萊麯組合)에서 고원(雇員)으로 일했다. 1929년 3월 중국 망명 당시 공금이자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자 1,500원을 가져갔다. 이것이 횡령죄 적용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우라카미형무소(浦上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3년 9월 6일 형 집행 만기로 출옥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 동래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의 여파가 국내에 미쳤다. 그는 1933년 10월 다시 체포되었다. 1934년 5월 10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지만, 22일 불기소(不起訴)로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출옥하자마자 동래에서 순국(殉國)했다.
정부는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8. 6. 27, 7. 4, 7. 13, 8. 15, 1935. 8. 24)
- 사상휘보(思想彙報)(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5. 9) 제4호 2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