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양부(平壤府)의 평양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2년 봄 무렵부터 우종식(禹鍾植) 등과 함께 교내에서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학년에 따라 반(班)을 결성하여 비밀리에 민족적인 서적을 읽었다. 기관지 「적군(赤軍)」을 인쇄하여 서로 돌려보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동료 학생들에게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규탄하는 격문을 배포했다. 이종필 등 독서회 회원들은 5월 1일 메이데이에는 노동청년층에도 격문을 뿌렸다. 9월 일본의 불법적인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종필은 ‘불온’한 서적과 문서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2년 4월 16일에 평양사범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해 여름방학 무렵부터는 고향인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松炭面) 지산리(芝山里)에 내려와 평택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모색했다. 진위군에 있는 금릉학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빈농(貧農)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9월 평택에서 남상황(南相荒) 등 3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평택노농협의회(平澤勞農協議會)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한편 평양사범학교 독서회 조직은 한층 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개인으로부터 단체로’라는 모토 아래 각기 부서를 담당해 활동하기로 했다. 1932년 11월에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라는 비밀결사로 개편하였다. 같은 달 말경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이에 연루되어 이종필도 같은 달 26일 평택경찰서에 체포되었고 다수의 서적 등을 압수당하였다. 당시 경찰은 “교육계로 진출할 사범학교 학생들이 결사를 조직 … 대단히 유감”이라면서, 평양과 평택 및 인천의 검거사건을 묶어서 ‘조선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취급하였다.
이종필은 1932년 12월 14일 남상황과 함께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로 호송되었다. 19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검사국에 기소되었고, 26일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1년이 지난 1933년 12월 26일에 예심이 종결되었다. 1934년 11월 26일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35년 2월 1일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평택에 거주하면서 주류판매업(酒類販賣業)을 했다. 1937년 12월 15일부로 『동아일보(東亞日報)』 평택지국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7년 2월경 월간잡지 『상공계(商工界)』 주간이던 최웅진(崔雄鎭)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8월경 최웅진과 임덕철(林德哲) 등에게 “지나사변(支那事變)은 다시 일본과 소련의 전쟁이 되어 세계대전으로 진전될 것이니, 결국 일본은 경제적 파탄을 맞아 패전(敗戰)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1938년 3월 23일 ‘사변에 관한 조언비어(造言飛語)’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되었다. 7월 8일 예심에 회부되었고, “전과(前科)가 있음에도 조금도 개전(改悛)되지 않고” 실천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중형이 구형되었다. 1939년 8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40년 11월 22일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사상휘보(思想彙報)(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8) 제16호 36면․제17호 36면
- 한국민족해방운동사자료집(김경일, 1993) 제6권 561, 568면
-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