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6403
성명
한자 金宇洛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2019 훈격 애족장
1911년 2월 경북 안동에서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뒤 ‘해도교거사’, ‘간운사’ 등을 지어 독립운동 참여를 다짐하는 등, 1932년 귀국할 때까지 경학사(經學社), 부민단(扶民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을 이끌었던 남편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을 지원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854년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에서 아버지 김진린(金鎭麟)과 어머니 함양박씨 사이에서 4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세 때인 1872년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결혼하여 고성이씨 가문의 임청각(臨淸閣) 종가댁 맏며느리가 되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자 이상룡은 가족 모두를 이끌고 만주 망명을 결정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이상룡이 먼저 떠났다. 김우락은 아들 내외 등과 함께 1월 25일 국경을 넘었다. 2월 7일 회인현(懷仁縣) 항도촌(恒道村)에 도착했다.

김우락은 만주로 온 이후인 1911년 10월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라는 한글 가사를 썼다. 그녀가 쓴 가사의 내용은 남편인 이상룡이 망명을 결정할 무렵의 일을 기록하고 있고, 만주에 망명하여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적었다. 또한 이 가사에는 여성의 몸이지만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고자 하는 자신의 심경도 드러내고 있다. 「해도교거사」외에 그녀는 1914년 말 고국에 있는 형제자매, 특히 여형제들에게 편지 글을 대신해서 「간운사」라는 가사를 썼다.

김우락은 만주로 온 이후 남편 이상룡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게 가산을 팔았다. 1932년 5월 이상룡은 길림성(吉林省)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순국을 하고 말았다.김우락은 남편의 시신을 만주에 묻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밤에만 걸어 석 달 만에 서울에 도착하여 안동에 들어갔다. 1933년에 7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는 2019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김우락 : 1911. 10. 6)
  •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개정판)(허은, 2010) 102, 120, 122, 123, 147, 148, 155, 156, 168, 170면.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바로가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와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우락(관리번호:956403)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