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7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마산의 호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한국인 교사의 해직 반대와 친일 교사 배척, 동교(同校)의 지정교(指定校) 승격 반대 등을 내걸고 9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같은 해 7월 10일경 김남귀(金南貴)·한기벽(韓基碧)·김득수(金得珠)·한태일(韓泰日)·박성인(朴性寅)·이수강(李壽崗)·최성수(崔性洙)·황갑수(黃甲秀) 등 동료 학생 10여 명 및 마산청년동맹(馬山靑年同盟) 상무위원 이상조(李相祚)와 함께 기소되었다. 8월 10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마산지청(馬山支廳)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조선방직회사 직공으로 일하던 1930년 9월, 동료 직공 김용수(金容壽)·박신태(朴新泰)·구성복(具聖福)·김두형(金斗衡)·문성옥(文成玉)·권석진(權碩震)·조경득(趙庚得)·이삼만(李三萬) 등과 함께 임금인상·대우개선·해고반대 등 10여 개의 조건을 기재한 문서를 배포하며 파업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같은 달 29일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 고등계(高等係)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10일 김용수·이삼만 등과 함께 ‘출판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1월 28일 벌금(罰金) 120원(미납 시 노역장 유치 60일)에 처해졌다.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에 대한 비판 연설회를 개최하여 일반 대중에게 그 진상을 알림으로써 중국인을 습격하는 등의 불상사를 방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같은 달 7일 밤 부산진(釜山鎭) 공장지대의 철공조합(鐵工組合) 사무실에서 사회단체 간부 10여 명이 모여 비판 연설회 개최에 관해 구체적으로 협의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다. 이어서 8일 새벽에 그 광고 선전문을 부산시내 곳곳에 부착하는 등으로 활동하다가 김성태(金聖泰)·박제(朴濟)·김시엽(金時燁)·안상교(安相敎)·김도윤(金道允)·최석조(崔錫祚)·최인돈(崔仁敦)·최성학(崔成鶴)·조유식(趙裕植)·김두업(金斗業)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속되었다. 이후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웅동면(熊東面)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웅동적색농민조합(熊東赤色農民組合) 관련으로, 1934년 10월 부산경찰서 고등계에 또 다시 체포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집행원부(執行原簿)(부산지방법원검사국, 1930)
- 동아일보(東亞日報)(1928. 6. 21, 7. 12, 8. 2, 8. 14, 1930. 10. 12, 10. 23, 11. 7, 11. 15, 11. 21, 11. 28, 12. 1, 1931. 7. 11, 1934. 10. 23)
- 매일신보(每日申報)(1928. 8. 12, 1930. 10. 2, 10. 12)
- 중외일보(中外日報)(1928. 6. 22, 8. 2, 8. 14)
-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경상남도경찰부, 1936) 74면
- 한국민족해방운동사자료집(김경일, 1993) 제10권 346~35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