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함경남도 북청군 출생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의병장 홍범도(洪範圖)의 아들이다.
홍범도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 고공(雇工) 생활을 하다 1887년 평양 친군서영(親軍西營, 평양친위대)에 입대해 3년간 복무했다. 이어 1891년 함남 단천(丹川)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하다가 1893년 삼수(三水)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북청군의 안산사(安山社)로 이주했다. 북청군 안산사와 안평사(安坪社) 2면의 ‘안산사 포계(砲契)’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포연대장(捕捐大將)이 되었다. 1907년까지 14년 동안에 삼수·갑산(甲山)·풍산(豊山)·북청 일대에서 포수로 부인 이씨와 아들 양순과 용환(龍煥) 2명과 생활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 9월 6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공포를 계기로 홍범도는 태양욱(太陽郁)·차도선(車道善)·송상봉(宋相鳳)·허근(許槿) 등 산포수들과 1907년 11월 함경남도 북청의 후치령(厚峙嶺) 등을 거점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 엄방동(嚴方洞)에서 회집하여 11월 16일 친일파 안산(安山) 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총살하고 인근 부일배를 소탕했다. 11월 24일 후치령 전투, 11월 31일 차도선 의병과 함께 삼수 전투, 12월 15일 북청 근방 도로 등에서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전승했다.
이에 일본이 북청·함흥·성진의 3개 수비대 등으로 토벌대를 편성했으나 1908년 1월 10일 갑산 수비대가 전멸되고 우체국 등 일제기관이 파괴됐다. 이어 이원(利原)·단천(端川)·풍산(豊山)·갑산(甲山)·혜산진(惠山鎭) 일대의 산악 지역을 다니며 유격전을 전개했다. 일본은 의병에 대해 한국 황제와 정부의 이름을 빙자하고 관리들을 통해 회유 공작을 전개했다.
3월 20일 북청수비대에 소속된 제3순사대장 임재덕(林在德), 경시(警視) 김원흥(金元興) 등이 능구사 창평리(倉坪里)에서 홍범도 귀순 공작을 위해 가족들을 감금했다. 사자(使者) 8명을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자, 부인 이씨를 고문하며 회유 편지를 강요했다. 부인은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죽어도 안 쓴다."라고 끝까지 버텼다.
이때부터 홍범도의 아들 홍양순은 의병의 기초 훈련을 받고 의병 간부로 활동했다. 4월 2일 임재덕 등이 일병과 군대를 이끌고 주둔하자, 홍범도는 나아가 맞서 소탕하며 임재덕, 김원흥 등을 체포해 처형했다. 4월 16일 이후 능구 패택·약수동·장진 능골 늘구목·동사 다랏치 금전 등에서 일병들을 사살했다.
북청수비구 예하 일본군 부대들은 사령관 장곡천(長谷川) 중좌(中佐) 지휘하에 5월 19일부터 후치령을 지나 신풍리로 집결했다. 이들 일본 부대들은 5월 하순부터 장파(長坡)·금창(金昌)·갑산(甲山)·혜산진(惠山鎭)·장항리(獐項里) 방면에서 홍범도 의병부대를 압박했다. 이에 홍범도 의병부대는 5월 31일 구름물영·갑산 청지평, 6월 2일 괴통병 어구 등에서 전승을 거두고 약수동을 넘어가 여해산 평풍바위 밑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후에 각지로 흩어진 후 6월 7일 동사 다랏치 금점에서 일병들을 사살한 후 수동골수를 넘어 함흥 천보산 절에 들어갔다. 6월 13일 노희태(盧熙泰) 의병부대 540명과 연합하여 6월 16일 천보산 전투 후 영흥산면 요덕 방면으로 가려고 정평(定平) 한대골 어구에 당도해 일병과 교전했다. 바맥이 전투에서 일병 500명과 전투하여 100여 명을 사살했으나 의병도 6명이 순국하고 8명이 중상을 당했다. 오전 12시경 중대장 임무를 수행하던 홍양순도 순국했다.
이처럼 홍양순은 홍범도 의병부대의 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1908년 6월 16일 함남 정평 바맥이에서 일본군 토벌대와의 전투 중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홍범도일기(이인섭 필사본, 1958. 6. 10)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786~790면
-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이현재, 1979) 홍범도편 53면
-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반병률, 2014) 49, 56~57, 59, 66, 69, 242, 244~24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