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공립협회 하변지방회 회원으로 동회 북미총회에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대표원 파견을 제안하고, 1915년 ‘신한민보는 우리의 인도자’라는 글을 신한민보에 게재하였으며, 1921년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구제원으로 다뉴바 특별대회에 참석해 경신참변과 항일정신에 관한 연설을 함.
1930년 장인환 의사 장례식의 추진을 촉구하였으며, 1932년 이봉창 의사 추도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발표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06년 9월 미주 공립협회(共立協會) 회원들과 노동조합 설립을 발기하고 총회에 청원하였다. 1907년 6월 리버사이드지방회(河邊地方會) 회원 김인수·전낙청과 함께 공립협회 총회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표원 파견을 제안하였다. 1908년 6월에는 프레스노지방회(富市地方會) 회원들과 연합공립관을 설립하고 토론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09년 7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 리버사이드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1월 동 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레드랜드지방회(紫地地方會)로 이전하여 대의원을 거쳐 1912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시 다뉴바지방회로 옮겨 1914년 6월 구제원으로 선임되었고, 1915년 4월에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신한민보는 우리의 인도자」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1916년 동 지방회 학무로 선출되었으나 2월 사임하였다. 1917년 8월 국민회가 은행채 보상 발기인 500인을 모집하자 제4회 발기자로 참여하였고, 1918년 5월에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식자기계채 청장 동맹자를 모집하자 제4회 동맹자로 참여하였다.
1919년 맨티카지방회 부회장 겸 재무로 선임되었다. 1921년 다뉴바지방회 구제원으로 같은 해 1월에 열린 다뉴바 특별대회에 참석하여 경신참변(庚申慘變)과 항일정신에 관한 연설하였다. 같은 해 5월 동 지방회 간도참상 구제위원으로 활동하며 모금한 구제금 978여 원을 총회로 송금하였다.
1930년 6월 중가주(中加州) 리들리에서 장인환(張仁煥) 의사의 장례식 추진을 촉구하였으며, 같은 달 이승만(李承晩) 계열의 대한인동지회가 리들리에서 조직되자 임시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32년 11월 중가주 대한인공동회가 리들리한인교회에서 이봉창(李奉昌) 의사 추도식을 개최하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였다. 1936년 한국에서 여생을 보낼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가 폐렴으로 입원 치료하던 중 12월 1일 별세하였다. 1905년부터 1932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신한민보(新韓民報)(1909. 6. 30, 7. 14, 11. 3, 11. 10, 1910. 1. 12, 5. 11, 10. 5, 1911. 4. 12, 8. 2, 12. 11, 1912. 1. 22, 1913. 9. 19, 1914. 6. 11, 6. 18, 1915. 4. 29, 10. 14, 1916. 2. 8, 3. 9, 1917. 3. 8, 5. 17, 9. 13, 1918. 2. 14, 6. 6, 6. 13, 6. 20, 8. 15, 9. 12, 9. 26, 1919. 1. 30, 2. 20, 4. 19, 4. 24, 10. 9, 1920. 6. 11, 9. 9, 1921. 1. 20, 2. 17, 5. 26, 8. 11, 1929. 1. 24, 12. 12, 1930. 3. 27, 5. 1, 6. 5, 7. 3, 1931. 7. 16, 1932. 4. 7, 5. 26, 9. 8, 11. 3, 1936. 12. 3)
- 공립신보(共立新報)(1905. 12. 6, 1906. 10. 7, 1907. 5. 10, 6. 21, 1908. 6.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