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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2월 21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잉차면(艿次面) 삼리(三里)에서 아버지 박정현(朴鼎鉉)과 어머니 김성진(金聖鎭)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은 영각(泳珏)이다. 문혜관(文惠寬)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191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어려서부터 집안의 농사를 도우면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05년 강서군 성태면(星台面) 성삼리(星三里)로 이주하여 4년간 농사를 지었다. 1908년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입학하여 중학과정을 3년간 공부하였고, 1911년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고, 후일 장로교 장로가 되었다. 이 시기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서도 활동하였다. 1915년 어머니의 고향인 평남 용강군(龍岡郡) 오신면(吾新面) 도학리(島鶴里)로 이주하여 2년간 살다가 1917년 차이나(China) 호를 타고 7월 2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중부의 맨티카(Manteca)에 정착하였다.1917년 11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맨티카지방회 차기년도 법무로 선임되었으나, 1918년 6월 사임하였다. 1918년 5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식자기계채 청장 동맹자 모집에 제1회 동맹자로 서약하였다. 그 해 12월 맨티카 한인 교회 건축의연금으로 5달러를 기부하였다. 1918년부터 11월부터 1919년 12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대표의연·21례금·애국금·공채표·독립의연금 등 5종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145달러 35센트를 후원하였다.1919년 2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을 위해 자유공채 50달러와 적십자회비 2달러를 후원하였다. 그 해 3월 본국에서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맨티카·스탁톤·트레이시(Tracy) 등 3개 지역 한인들과 합동으로 경축식을 거행하고 기도를 하였다. 같은 해 5월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인구등록 규정을 공고하고 이를 위해 인구등록 총부 위원과 파출소 위원을 임명할 때, 트레이시 파출소 위원으로 임명되어 트레이시 거주 한인 등록과 독립의연금·21례금 등을 모집하였다. 또한 이 시기 임준기(林俊基) 등 흥사단(興士團) 단우들과 임시 합자농작(合資農作)을 시작하였다. 1920년 1월에는 흥사단 정식 단우가 되어 제100단우가 되었다. 그 해 5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가 재무관 산하에 각지 지방위원을 선임할 때, 슈페리오 지방위원으로 선정되어 구미위원부 재정 마련에 힘을 보탰다.1923년 위영민(韋泳敏)이 캘리포니아주 남부 태프트(Taft)의 태평양석유회사(Pacific Oil Company)에 한인들의 노동을 적극 주선하자, 태프트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1923년 3월 국민회 태프트예비지방회 삼일절 기념식과 1924년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기도를 담당하였다. 이후 태프트지방회에서 주관한 행사에서 자주 기도를 맡았다. 1924년 10월 태평양석유회사에서 일하던 강영문·조울림·위영민 등 6명과 함께 소유한 집이 화재로 소실되었다.1925년 11월 29일 태프트지방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추도식’에서 기도를 담당하였다. 1926년도 임원 선거에서 법무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말 흥사단 제12회 대회가 개최되자, 참가하여 30달러를 기부하였다. 1928년 3월 만주동포동정금 17달러 25센트, 11월 내지수재구제금 12달러를 모집하여 송금하였다.1931년 12월 딜라노로 이주하여 김순기·이진섭·안용범·강웅주와 40에이커의 땅에 수박농사를 지었다. 1932년 딜라노지방회 주최로 열린 2월의 국민회 창립기념식과 3월 삼일절 기념식에서 기념금을 후원하였다. 그 해 3월에는 딜라노지방회 회원들과 함께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군대 위로금을 모집하여 33달러 50센트를 후원하였다. 같은 해 5월 딜라노에 거주하는 흥사단우 이용선·조울림·윤진오·계옥룡·최희송 등 7인과 흥사단 현안 문제를 논의하였다.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1933년 10월 흥사단 사무원 김병연과 동반하여 캘리포니아주 중부지역과 북부지역을 순행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남부 캘리포니아주 알함브라(Alhambra)에서 김성봉·김종학·양두형과 함께 과채상점을 운영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24회 흥사단 대회에 로스앤젤레스 지방 위원으로 참석하였다. 1935년 1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국어학교인 삼일학교가 재정으로 곤란을 겪자,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정착 30주년을 기념하여 조직된 교미(僑美)30년 기념회에 참석하여 2달러를 후원하였다. 1937년 2월 4인이 운영하던 알함브라 과채상점 운영이 어렵게 되자, 과채상점은 양두형이 홀로 운영하였다.차남 원규는 중국 칭타오(靑島)대학 예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차 1926년 7월 28일 상하이(上海)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아버지와 10년 만에 상봉하였다. 원규는 1927년 12월 29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흥사단 정식 단우로 입단하여 제219단우가 되었고, 1930년 8월 1930년 8월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대학 체육과를 졸업한 뒤 아사마 마루 선편으로 귀국하였다.1917년부터 1943년까지 국민의무금 17회 140달러, 독립의연금 4회 125달러, 광복군 후원금 2회 50달러, 한인승리공채 300달러, 신한민보 경비 보조금 10달러, 국민회 총회관 건축의연금 25달러 등 수 십 차례에 걸쳐 694달러 이상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후원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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