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김제민은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와 강서군
(江西郡)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사천시장(沙川市場) 일대에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는 평양 서쪽으로 약 50리 지점에 있으며, 원장에서 모
락장(沙川)까지 약 25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두 곳은 다른 군이지만 각기 면
사무소 소재지이며, 5일 만에 한 번씩 서는 장날에는 서로 왕래가 잦았다. 또한
기독교 장로교파 소속 반석·원장교회는 각각 수백 명씩의 신도를 갖고 있었다.
두 교회는 3월 4일 원장리 장날 오전 10시에 합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
다. 시위는 먼저 원장교회 장로 차병규(車炳奎)의 기도, 장로 지석용(池錫湧)의
독립선언서 낭독 등의 순서로 진행하였다. 참가자들은 모두 양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행렬의 선두가 사천시
장 초입에 당도하였을 때에 가까운 곳에서 현지 헌병주재소장이 지휘하는 헌병
들은 시위 참가자들에게 무차별 총을 난사하고 4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체포된
시위대원들을 강서, 평양 2경찰서에 나누어 구금해 놓고 가혹하고도 야만적인
고문을 연일 계속했다. 그리하여 피검자 중 최명흠(崔明欽)은 평양경찰서에서,
김점현(金漸鉉)은 강서경찰서에서 순국했다. 이때의 고문이 얼마나 혹심하였던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김제민은 3월 17일 평양헌병대에 체포되어 세 번의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임원걸(林元杰)·양희언(梁希彦)의 판결문에는 김제민과 최명흠이 헌병에게 고문을 받다가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高等法院:1919. 12. 6)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789~79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380~382, 409~413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