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김우득은 경북 흥해 출신으로 1907년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에서 성익현의진(成益顯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1908년 2월 이후에는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과 정경태의진(鄭敬泰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이후 울진지역의 의병투쟁은 일본인, 일제의 침략기구인 경무 분견소(警務分遣所)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각 지역의 관아 및 징세기구인 세무서 등이 주요한 공격 목표였다. 울진지역에는 신돌석의진,성익현의진,정경태의진 등의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신돌석의진은 1906년 창의 이래 영덕,영해,울진,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7년 11월부터 이강년과 연결하여 순흥,봉화 등지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1908년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회진하여 영덕,영해,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원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한편 울진지역에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던 의병은 성익현의진이었다. 성익현은 1907년 8월 울진 등 동해안 일원에서 창의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었고, 도총장 정경태, 부장 이상열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성익현이 1908년 6월 자취를 감쳐 만주로 망명한 뒤 정경태가 관동창의대장에 취임하여 울진,평해,삼척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정경태의진은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각처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김우득은 1907년 성익현의 휘하에 투신하여 울진,평해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부터 신돌석과 정경태의 휘하에서 영해,영덕,진보 등 각처를 전전하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우득은 1909년 11월 14일 오전 1시경 정경태 등 13명의 의병과 함께 영덕군 보곡동(洑谷洞) 전 면장 신창휴(申昶休)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총살하였고, 16일에는 영해군 서면 창수원(蒼水院)에서 의병을 밀고한 하대윤(河大潤)을 처단하였다.
김우득은 1910년 4월 14일 영덕군 북면에서 체포되어 1910년 5월 30일 징역 7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형사사건부(1910. 5. 7)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1986) 資料18 義兵篇 69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