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25년 10월 30일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전북청년연맹(全北靑年聯盟) 창립대회에 참여했다. 이후 조사부와 교양부에서 활동했다.
1926년 1월 병인지우회(丙寅知友會)를 창립하고 서무부에 몸담았다. 2~3월 옥구농민조합의 창립에 앞장섰다. 옥구군 미면(米面) 미룡리(米龍里)에서 김상희(金相熙) 등과 함께 10대 무산아동의 교육을 위해 미제장학계(米堤獎學稧)를 설립하고, 1926년 6월경 교실을 신축하고 강사로 활동했다.
1927년 2월 전북청년연맹 ‘도내 순회위원’으로 뽑혔다.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전북연맹 교양부 위원이 되었다. 2월 초순경 옥구군 미면(米面) 미룡리(米龍里) 자택에서 이평권(李平權)의 권유로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했다. 3월 중순경 김준철·이태로(李泰魯)와 함께 ‘옥구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6월 신간회(新幹會) 옥구지회(沃溝支會)를 설립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그 즈음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신간회 옥구지회 프랙션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10월 2일 장태성(張台成, 張公郁) 등과 함께 옥구농민조합(沃溝農民組合) 서수지부(瑞穗支部)를 창립하고 간부가 되었다. 추수기(秋收期)를 맞아 후타바샤 농장에서 75%에 달하는 고율의 소작료를 현물(現物)로 납입할 것을 통보했다. 장태성과 함께 소작료율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였다. 11월 20일 장태성과 함께 농민들을 대표하여 농장 지배인 사이토(齋藤信一)를 찾아가 소작료 감액 교섭을 추진했다. 농장 측에서는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였다.
11월 25일 저녁 군산경찰서(群山警察署) 순사 김종현(金宗鉉)이 장태성을 압송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행규는 주민들을 모아 장태성을 구출하기로 했다. 이날 밤 500여 명의 소작인은 임피역(臨陂驛) 앞에 모여 조합 간부의 검거에 항의해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를 습격하고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주재소 습격 소식을 들은 군산경찰서에서는 곧바로 경관대(警官隊)를 파견하여 80여 명의 조합원과 농민 등을 검거하였는데, 이때 주모자로 지목된 김행규도 체포되었다. 12월 8일 동지 40여 명과 함께 이른바 ‘소요(騷擾) 및 구금자(拘禁者) 탈취죄(奪取罪)’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1928년 2월 29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 군산지청(群山支廳)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3월 2일에 공소(控所)를 제기했다.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벌금 20엔을 선고받고 방면되었다.
1928년 9월경 ‘제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김준철·이태로 등과 함께 또 다시 군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2년 2월 8일에 출옥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7. 9. 16, 10. 26, 11. 29~30, 12. 10, 12. 22, 1928. 2. 2~4, 3. 1~2, 6. 4, 1930. 12. 4, 12. 9, 12. 23, 1932. 2. 9)
- 사상월보(思想月報)(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1) 제1권 제5호 285면
-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