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32년 3월 공주사립영명학교(公州私立永明學校)를 졸업하고 4월 서울 법정학교(法政學校)에 입학했다. 이 전후의 시기에 김윤회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 1933년 8월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한편 9월 국제공산당 관련 활동을 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관여했다.
1934년 9월부터 이재유(李載裕)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지역 내 학교와 공장, 인천지역 공장 등지에서 ‘적화공작(赤化工作)’이 이루어질 때 박영출(朴英出), 심계월(沈桂月) 등과 연계해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이들은 장충단공원에서 여러 차례 모여 공산주의 운동의 파벌투쟁과 지식계급의 실천 투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이 결과 적색노동조합(赤色勞動組合)을 조직해 투쟁을 실천하기로 했다. 또한 김윤회는 인천의 공장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이인행을 집에 머무르게 해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하도록 했다.
이후 김윤회는 11월 하순까지 심계월의 요청으로 이재유와 함께 공산주의 연구를 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실천운동을 기획했던 유순희(兪順姬)의 은신을 도왔다. 심계월, 유순희와 가족으로 위장해 40일 동안 생활하면서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연구했다. 또한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방법 등에 대해 토론했다. 한편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가 체포된 후 “혁명운동 달성을 위해서는 희생자 및 그 가족을 구원할 필요있다”며 미야케 교수 아내의 고서점인 가메야(龜屋)의 개업을 도왔다. 1935년 1월말부터 5월 중순에는 일본 경찰로부터 도피할 당시 미야케 아내에게 2회에 걸쳐 도피자금을 조달받기도 했다.
김윤회는 ‘국제공산당 사건’으로 인해 동지 16명과 함께 체포됐다. 그리고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혐의로 신의주형무소(新義州刑務所)에 수감돼 있다가 1934년 1월 2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적색노동조합 조직 투쟁의 일환인 용산적색노동조합 사건으로 체포됐다. 1936년 7월 30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범인 은닉(犯人 隱匿)’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8년 3월 2일 출옥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수형인명표폐기목록受刑人名表廢棄目錄(정산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10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