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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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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董曾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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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2005 훈격 애국장
1907년 11월부터 함경남도(咸鏡南道) 삼수군(三水郡) 중평장(仲坪場)에서 홍범도 의진(洪範圖義陣)에 가담하여 동도(同道)중국(中國) 간도(間島) 일대(一帶)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10월 체포되어 취조(取調)동년(同年) 11월 2일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군(北靑郡)에서 일본군(日本軍)에 의해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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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07년 11월부터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 중평장(仲坪場)에서 홍범도의진(洪範圖義陣)에 가담하여 함경도 및 중국 간도(間島)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홍범도는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동년 9월 일제가 민중들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총포화약류단속법(銃砲火藥類團束法)을 공포하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동년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 등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고 의병을 일으켜 북청(北靑)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삼수(三水)·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비대에 항전하였다. 1907년 11월 22일 후치령전후(厚峙嶺戰鬪) 이후 각처에서 승리하였으나 1908년 9월 영동전투(靈洞戰鬪)를 치르고 탄약이 고갈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홍범도는 탄약을 구입하기 위해 부하들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동증손은 1908년 9월 25일경 의병장 홍범도의 명령으로 청국에 탄약을 매입하기 위해 파견된 임재춘(林在春)과 정일환(鄭日煥)이 탄약 구매비 600원을 소비하고 탄약을 가지고 오지 않자 체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동년 10월 12일 중국 관헌에 체포되었다. 그 후 제3순사대(第三巡査隊)의 취조를 받던 중 동년 11월 2일 함남 북청군(北靑郡)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洪範圖 義兵部隊의 抗日武裝鬪爭(신용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 1986) 63면
  • 韓國獨立運動史資料(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271∼282면
  • 秘收 제240-1호(1908. 11. 10), 暴徒에 關한 編冊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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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동증손 - 함남 삼수(三水) -
본문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 중평장(仲坪場) 출신이다. 함남에 파견된 제3순사대의 1908년 보고서에 당시 32세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877년에 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1907년 7~8월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전국적으로 격렬한 항일전이 벌어졌다. 특히 군대해산은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 고조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함경도 지역에서는 1907년에 이르러 홍범도·차도선(車道善)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는 평양 진위대 출신이었다. 함경도로 이주한 뒤 포수와 광부로 있던 중 1907년 11월 차도선·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 등과 더불어 산포수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유학자로 지칭되는 지식인층과 해산 군인, 광산 노동자, 농민 등이 가담하면서 홍범도 의병부대는 급격한 양적 팽창을 하게 되었다.이러한 홍범도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고향인 중평장을 지날 때 의병부대에 가입하였다. 이후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후치령 전투를 시작으로 1909년 5월 삼수군(三水郡) 신갈파진(新乫坡鎭)을 거쳐 중국 퉁화(通化)로 건너가기까지 일본 군경과 총 37회의 격전을 벌였다. 일제는 홍범도 의병부대 등 함경도 지역 의병을 탄압하기 위하여 초기부터 군사적으로 강력히 대응하였다. 1908년 6~7월 일본군의 탄압으로 홍범도 의병부대를 비롯한 함경 지방 의병부대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탄약 등 군수물자의 부족이 심각하였다. 홍범도는 탄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조화여와 김충렬(金忠烈) 두 사람을 연해주 연추(현 크라스키노)로 파견하였으나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8년 9월 25일 홍범도는 다시 탄약구입을 위해 임재춘(林在春)과 정일환(鄭日煥)을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홍범도의 명령을 어기고 탄약비 600원만 소모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이때 홍범도로부터 이들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908년 10월 12일 대동사(大同社) 세동(細洞)에 있는 중국 경찰에게 붙잡혔다. 중국행 소식을 듣고 행적을 추적하던 일본 제3순사대는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한 것을 알게 되자, 대동사 세동의 제5순사 유경당(劉景堂)에게 조회하여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제3순사대에 신병이 넘겨지게 되었고,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조사를 받다가 1908년 11월 2일 함남 북청군(北靑郡)에서 희생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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