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함남 단천(端川) 하다면(何多面)에 거주하였다.
1930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함남 단천군에서 삼림조합(森林組合)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단천군청과 단천경찰서 앞에서 시위 중 일제경찰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조직된 삼림조합은 일제의 산림정책의 실행과 삼림자원의 보호 감시적인 성격이 컸다. 특히 삼림조합이 군(郡) 단위조합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경찰력과 행정력 등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운영되었다. 삼림조합이 농민들에게 끼친 가장 큰 폐해는 조합비의 과다한 부담이었다. 삼림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은 조합자체를 부인하려는 투쟁으로 이어졌고 단천삼림조합 반대투쟁이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단천삼림조합 반대투쟁은 삼림조합 설립 반대 뿐만 아니라 일제식민지배 자체를 타파하려는 투쟁이었다. 당시 삼림은 농민들의 생활터전이었으며 생계수단이기도 하였다. 특히 단천군 하다면·이중면·수하면·복귀면은 숯과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지역이었다. 이들에게 임산물 채취 금지와 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은 생계수단의 박탈과 같은 것이었다. 단천군민들에게 삼림간수들의 행패는 원성이 높았으며 삼림조합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 7월 단천군 하다면 연대리에서 삼림조합 간수가 삼림단속 중 연대리 주민 허달규를 도벌(盜伐) 혐의로 취조하려다 대신 그 부인을 구타하고 감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농민조합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면민 200여 명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다면민들은 이 문제가 면사무소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 사건을 확대시키기 위해 7월 18일 단천군청으로 항의하러 가던 중 일경(日警)과 대치하게 되었다. 일경의 "해산하면 좋도록 처리하겠다"는 말을 듣고 면민들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그날 밤 주모자 20여 명을 검거하는 등 오히려 면민을 탄압하였다. 이에 격분한 면민 400여 명은 19일 단천군청으로 가서 군수와의 면담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경의 위협에 일단 해산하였다. 농민들은 다시 하다면·복귀면·파도면을 중심으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7월 20일 단천군청 앞에 모인 2,000여 명의 단천군민들은 단천군청을 습격하고 단천경찰서로 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던 중 일경과 충돌하게 되었다. 일경은 정세가 점차 어려워지자 군중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김창언을 비롯하여 김계환(金啓煥)·최두필(崔斗弼)·장종형(張宗亨)·이선식(李善植)·최종협(崔鐘協)·안경룡(安京龍)·유경을(劉京乙)·안길현(安吉炫)·김을룡(金乙龍)·이원호(李元鎬)·김응철(金應喆)·김득수(金得洙)·허병률(許丙律)·심정붕(沈正鵬)·안병환(安丙煥)이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고 2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端川二千群衆民擾光景(三千里 8호 1930, 9) 2·6·10·11·38面
- 端川郡誌(端川郡) 140·141面
- 朝鮮治安狀況(1930) 115·116面
- 일제의 森林組合 결성과 한국인의 저항(강영심, 한국근현대사연구 第18輯) 133∼159面
- 東亞日報(1927. 7. 21, 7. 22, 7. 24, 7. 29. 8. 1, 8. 2, 8. 4, 8. 9, 9. 3, 9.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