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노령(露領) 아즈미 사람이다.
러시아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4월 일본군이 자행한 이른바 4월참변으로 연해주 일대 볼세비키 조직이 하바로프스크 방면으로 이동하자, 이만군대 사령관으로 볼세비키 전선에 가담하고 있던 그도 부대를 이끌고 북으로 이동하여 옴스크에서 안경억(安京億)·이다물(李多勿)과 더불어 한인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노보시비리스크에 간이군사훈련소를 설치하였다.
1921년 2월 이른바 일본군의 간도토벌(間島討伐)을 피해 간도지역 한인독립군부대가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 혹은 알렉세예프스크) 방면으로 이동해오자, 간도한인의 주둔지를 선정하기 위해 총군부(總軍府) 대표로 교섭위원에 선정되어 극동공화국정부(極東共和國政府)와 협의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고려군정의회(高麗軍政議會)에서 사할린의용대 인수를 위한 8인의 검사위원 중 1인으로 선정되어 자유시에 파견되었다.
그후 1921년 6월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부대의 군 통수권문제, 즉 상해파(上海派)의 이동휘(李東輝)가 후원한 한인니항군대(韓人尼港軍隊; 후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 일명 사할린부대)와 이르쿠츠크파의 문창범(文昌範) 등이 이끄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지지한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일명 自由大隊) 간의 군 통수권 장악을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동년 6월 이르쿠츠크 계열의 고려군정의회가 사할린의용대를 무장해제하는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났다. 자유시참변시 이동휘 계열의 독립군단(獨立軍團)에 참여한 그는 러시아 적군의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로 이송되었으며, 이송후 한인독립군부대와 함께 러시아 볼세비키의 제5군단 관할 여단에 배속되었다.
러시아 제5군단 산하에 한인 여단에 배속되자, 한인여단을 해산시켜 이동휘를 지지하는 연해주 방면의 군사위원회에 파견할 것을 계획한 그는 1922년 이동휘 계열의 채영(蔡英), 이다물, 전 자유대대 장교였던 제3연대장 황하일(黃河一), 2연대 정치위원장 송세주(宋世柱) 등 14명과 함께 군대해산문서를 작성하여 1차로 30여 명의 군인을 비밀리에 극동지역으로 파송하였고, 재차 다수의 군인을 인솔하고 탈출하려다 러시아 적군(赤軍)에 발각·체포되어 제5군단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이후 이르쿠츠크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3년경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日報(1923. 6. 24)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청계연구소) 1권 207·244·256·290·292·305·307·341·342·344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