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1919년 3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신천군의 3ㆍ1운동은 전국적인 시위운동의 전개양상과 보조를 같이 하며 1919년 3~4월 중 군내 각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신천읍은 황해선(黃海線)의 중심역이었고 사방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전국 각지의 시위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으므로 일경의 감시도 그만큼 엄중했었다. 따라서 신천군의 시위운동은 인근의 문화면(文化面)에서 처음으로 발화되어 전군으로 확산되었다. 문화읍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은 3월 11일의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우고 문창규, 김명성 등이 태극기를 제작하고 기독교인들은 각지로 비밀연락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1일에 장터인 동각리(東閣里)에 수백 명이 집결하여 대한의 독립을 선언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장꾼들의 호응 가세로 1,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은 대열을 이루어 시가를 행진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어 3월 15일에는 초리면(草里面) 달천리(達泉里)의 장날에 초리면ㆍ궁흥면ㆍ문화면 3개 면민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에는 국내에서 비밀발행되며 각지의 시위소식을 전하던 「독립신문」이 배포되기도 하였다. 19일에는 용진면(用珍面) 유천리(柳川里)의 유천장날을 이용하여 김화선(金化善)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 장꾼들의 호응으로 크게 기세를 떨쳤다. 김영국도 이와 같은 신천군의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의 총격으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略(金秉祚, 1920) 上篇 98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