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1919년 3월 7일 평북 철산(鐵山)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철산군의 만세시위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제휴한 연합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 계통 명흥학교(明興學校)의 교사 안태영(安泰英), 교장 심치규(沈致珪) 등은 천도교측의 정구석(鄭久錫)과 일반시민측 대표인 김정찬(金鼎贊) 등과 함께 비밀회의를 열고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거사일자는 3월 7일 읍내 장날로 잡았고 선언서의 등사 복제는 천도교측에서, 태극기의 제작은 안봉국과 심치경이 담당하였다.
거사일인 3월 7일 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기독교인, 천도교인들이 기독교회에 운집하였다. 계획에 따라 김영락의 사회하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호창이 있은 후 군중은 교회당을 출발하여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당시 교회당은 철산읍의 동쪽에 있었고 군청과 경찰서는 서쪽에 있었으므로 시위행렬은 자연스럽게 거리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장보러 온 많은 장꾼들이 이에 호응 합세하여 군중의 수는 수천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일제는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의 병력을 증파하여 시위행렬을 따르며 해산을 강요하였다. 시위행렬이 마침 우편국 앞을 통과할 때 일본인 직원들이 시위군중을 조소하며 욕설을 하자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들어 우편국에 투석으로 맞섰다. 투석전이 시작되자 빌미를 노리던 일제의 철도원호대는 그 즉시 시위군중에 대한 실탄사격을 퍼부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김효운은 이날의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환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略(金秉祚, 1920) 上篇 40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