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1919년 경기도 파주군(坡州郡)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하였다.
파주군의 만세시위는 와석면(瓦石面) 교하리(교하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3월 10일 구세군의 임명애(林明愛)가 주도하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생 1백여 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에는 교하리의 염규호(廉圭浩), 김수덕(金守德) 등이 인근의 군중 7백여 명을 인솔하고 와석면 사무소로 시위행진하여 면서기에게 휴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향하였으나 일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27일 청석면(靑石面) 심악산(沈岳山)에 집결한 수백 명의 군중이 보통학교 학생들을 앞장세워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여 면장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광탄면(廣灘面) 발랑리(發郞里)에서는 조무쇠(曺茂釗), 이인옥(李仁玉), 남동민(南東敏), 정천화(鄭天和), 정갑석(鄭甲石), 이기하(李起河) 등 8명이 3월 27일 동리 사람 수백 명을 규합하여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28일에도 시위군중이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조리면(條里面)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행진하였다. 때마침 봉일천 장날에 모인 많은 장꾼들이 합류하여 만세의 함성은 장터를 진동하였다. 이를 제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경이 총격을 가함으로써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외에도 문산을 비롯한 파주군의 각처에서 시위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남기는 이와 같은 파주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의 쇠갈쿠리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튿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略(金秉祚, 1920) 上篇 70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