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황해도 금천(金川) 사람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징역 20년을 받은 바 있는 부친 이명옥(李溟玉: 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군사혁명간부학교를 수료한 후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과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41년에는 이소민(李蘇民)의 지도로 절강성(浙江省) 금화(金華)로 파견되어 중국 관내 강남일대의 적후방공작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 독립분대로서 중국 제3전구 금화 일대에서 중국군의 항일 각 기관과 연락하며 적정(敵情) 수집, 동지 획득 등에 힘썼다. 또한 제3전구 사령부 소재지인 상요(上饒)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한국 청년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킨 후 의용대에 편입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동지획득 등을 위해 그가 상해로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상해에 도착한 그는 일본 영사관, 경찰서 등의 조직상황 파악, 일본군의 이동상황, 군사시설의 상황 등을 탐지하는 한편 12명의 동지를 규합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의 행방을 추궁하던 일경에 의해 모친과 어린 동생은 피살되고 그 역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경의 가혹한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고문대에 누워“조선청년으로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분투하다가 희생하는 것은 제일 광영(光榮)한 일이다. 죽어도 일본인은 될 수 없다”고 소리쳐 고문하던 일본인조차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국내로 호송되어가는 도중 배 위에서 압송되어 가는 여동생을 만나 모친과 어린 동생이 피살되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고 하니 일가의 참극이 후세인의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그는 결국 적의 감옥에서 고문으로 옥사 순국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이명옥, 이효상 일가의 참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천(上天)이 무심호 유자유녀도 독수(毒手)에 치명호(致命乎)아 상재인간호(尙在人間乎)아 망국 이래에 왜구에게 전가(全家) 도륙이 무릇 기백기천가(幾百幾千家)이랴마는 기미이래 상해에서 운동하던 장면에는 이명옥군이 당한 참독(慘毒)이 제1위에 거하겠다. 무릇 아동포 자손에게 일언을 유(遺)하노니 광복 완성 후에 이명옥 일가를 위하여 충렬문을 수안(遂安) 본향에 세워 영구 기념케 하기를 부탁하여 두노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白凡逸志(金九, 敎文社) 213·214面
- 朝鮮義勇隊抗日戰史(楊昭全·李輔溫, 1996) 179面
- 新東亞(1997·1月號) 528∼530面
- 앞길(1944. 8. 29)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734面
- 한국사회주의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410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