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강원도 평강(平康) 사람이다.
1907년 11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왕회종(王會鍾)의진에 가담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일제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 장악한 후 군대마저 강제 해산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자주권을 잃어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새로이 많은 인사들이 거의하여 의병전쟁을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1906년 경기 연천(連川)에서 거의한 왕회종 의병장은 임진강 유역과 경원(京元)가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52연대 소속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특히 1908년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던 13도 창의대진소(倡義大陣所)의 잔여 의병들과 연계하여 활발한 유격전을 펼쳤다.
김응봉은 왕회종의진에 소속되어 황해 신계(新溪)·토산(兎山), 경기 장단(長湍)·연천(漣川)·삭령(朔寧), 강원 이천(伊川)·안협(安峽) 등지에서 의병 군수금품 모집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이어 그는 왕회종 의진이 해진(解陣)한 후에는 연기우(延起羽)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연기우 의진은 임진강 유역 일대에서 강기동(姜基東)·이진룡(李鎭龍) 의병부대와 연계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진의 하나였다.
그는 연기우 의진에 참여하여 부일배처단, 군자금모집 등의 활동을 폈으나 1910년 동료 의병인 맹만복(孟萬福)과 함께 자택인 화암리(化岩里)에 일시 귀가하였다가 안협경찰관 주재소 순사대의 기습을 받고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8輯 26·27·32·33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