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황해도 은율(殷栗) 사람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며, 경신학교(儆信學校)를 거쳐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서 1년간 수학하다가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로 전학하였다. 기독교 청년회의 간부로서 그의 탁월한 지도력은 학생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국 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2일, 기독교측의 대표로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은 이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김원벽과 보성 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康基德)·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韓偉健)을 초청하였다. 이 자리에 박희도가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계획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학생들에 의한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일시 중지하고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자, 그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다시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선언식을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전개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25일 정동(貞洞) 교회내의 이필주(李弼柱)의 집에서 학생대표들을 소집하여 각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을 3월 1일 오후 2시까지 탑동공원에 집합시켜 민족대표들과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28일에는 다시, 각 중학교 대표들은 정동교회에,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은 승동(勝洞) 예배당에 소집시켜 이갑성으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 1,500매를 학생대표들에게 배부하여 당일 살포하게 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는 3월 5일에도 오전 9시를 기하여 남대문 역전에 모여 2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일 오전부터 탑동공원으로 모여든 학생의 수는 5천을 넘었고 상당수의 시민들도 합세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이 갑자기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자, 그는 강기덕 등의 동지와 함께 군중을 지휘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 일대는 동쪽으로, 일대는 서쪽으로 독립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제지를 받았으나, 오후 늦게까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4일에는 학생대표들을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기숙사로 소집하여, 이미 계획한 바와 같이 3월 5일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확인하고 시간과 장소를 오전 8시 서울역 광장으로 정하였다. 이튿날 수만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모인 서울역 광장에서 그는 강기덕 등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인력거를 타고서 시위군중 사이를 누비며 남대문쪽으로 향하여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때 급히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한때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기도 하였고, 신생활사(新生活社)·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등에서 일하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리원(沙里院)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18·1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20·833·85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7·91·102·110·111·112·223·30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71·185·231·83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15·21·26·30·41·47·48·50·51·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6·97·15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146·378·567·568·66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214·226·24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7·100·107·14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