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함남 덕원(德原) 사람이다.
만주와 노령지역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12년 북간도(北間島)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로 망명하여 같은 해 2월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가 간민회(墾民會)로 변경되자 이 단체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간민회는 1913년 1월 13일 중국지방정부의 설립 인가하에 조직된 단체였다.
이중집은 1919년까지 간도 소영자(小營子)학교 교사, 광성(光成)학교 교사, 기독교 전도사, 그리고 중국의 권학소(勸學所) 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1월 경 러시아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요청에 따라 한족독립선언서 제작과 공식발표의 사전 논의를 위한 간도지역 대표자에 김약연, 정재면(鄭載冕)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이에 대표로 선출된 김약연·정재면·정기영 등 3명은 2월 11일에 노령으로 출발하였으며, 그는 2월 13일 노령으로 출발하였다. 같은 해 3월 말 경 니코리스크에 도착한 후 파리강화회의 대표 문제와 기타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한 이래 이곳에 잔류하였다.
1920년 4월 신한촌 참변으로 인하여 연해주에서의 한인민족운동이 크게 위축된 가운데 같은 해 6월 5일 연해주 추풍(秋豊) 당어재골 신길동(新吉洞)에서 최문서(崔文瑞)·최찬식(崔燦植)·황원호(黃元浩)·이근선(李根善) 등 14명이 모여 한인 무장부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같은 해 8월 6일 13개 지방 대표 26명이 참여한 가운데 솔밭관 한족공산당이 조직되었다.
1920년 그는 이 단체의 위원장으로서 김경권(金京權, 부위원장)·유해사(柳海史 : 柳震九, 선전부장)·장화삼(蔣化三, 노동부장)·장학년(張學年, 경무부장)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는 1921년에는 행정부장으로서, 1922년에는 위원장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이중집은 한족공산당의 군정의회(軍政議會)에서 당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중집은 1922년 9월 경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연해주 총지부 총재로서 활약하였다. 당시 총사령관은 김규식(金圭植)이었다. 1922년 말 일본군이 철수한 후 러시아 당국은 러시아에 있는 한인무장부대의 무장해제를 요청하였다. 이에 옛 부하들을 이끌고 라즈돌역 부근 우두고우촌에 사회생활이라는 집단 농장을 창설하여 거주하다가 스탈린에 의하여 숙청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285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3卷 5·15·429面
- 日帝下 極東시베리아의 韓人 社會主義者들(마뜨베이 김) 162·163面
- 忘却된 反日革命家 李仲執先生(劉秉虎) 381∼38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703·79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80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9輯 825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6卷 83·84·86面
- 소련 韓族史(鄭泰秀 편역) 115·284面
-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國家報勳處) 第5輯 365∼36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419·421·684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