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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239
성명
한자 金振聲
이명 王雲起, 金澤基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1. 기미만세(己未萬歲)조부(祖父)선두 활동(先頭活動)초산 일헌(楚山日憲)피체(被逮) 투옥 순국(投獄殉國)

2. 중국(中國) 망명(亡命) 독립운동(獨立運動) 계속(繼續)(父)피체(被逮) 투옥(投獄)되고 (兄)독립군(獨立軍) 최석순(崔碩淳) 부대(部隊)소속(所屬)

국내 잠입(國內潛入) 활동(活動)부상(負傷) 피체(被逮) 투옥(投獄)

3. 본인(本人)국민부(國民府) 제2중대(中隊) 입대(入隊) 박창철(朴昌鐵) 대장(隊長) 휘하(麾下) 특무정사(特務正士)외차구 주재(外岔溝駐在) 일군(日軍) 수비대(守備隊)

밀정(密偵) 정남해(鄭南海) 체포(逮捕)(爲)잠입(潛入) 활동(活動)동지(同志) (妻)고발(告發)초산서원(楚山署員)피체(被逮)

신의주지법(新義州地法)에서 예심종결(豫審終決) (1934. 12. 28 동아일보(東亞日報)) 1935년 6월 28일 검사 구형(檢事求刑) 사형(死刑)

에 (1935. 6. 30 매일신보(每日新報)) 7월 5일 무기(無期)언도 판결(言渡判決) 재심 공판(再審公判)에 15년 언도(言渡)

(지문조회(指紋照會) 대조(對照)) 복역(服役) 해방(解放)으로 출옥(出獄) 병사(病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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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황해도 곡산(谷山) 사람이다.

1920년 부친 김정일(金그正의一)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유하현(柳河縣)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졸업하였다.

1932년 6월에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하여 제2중대 참사로 무송(撫松)·안도(安圖)·신빈(新濱)·통화(通化)·집안(輯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음력 7월에 집안현 외차구(外 溝)에서 김창화(金昌化)·김병하(金炳河)·강성채(姜成彩)·정종준(鄭宗俊)·김승호(金承浩)·이봉영(李峯英) 등과 함께 일본 밀정인 김용환(金龍奐)을 처단하고 붙잡혔다. 김용환은 전직 위원군(渭原郡) 순사로서 집안현 유수림자(柳樹林子) 강구(江口)에서 국민부의 상황을 일경에 밀고하고 교민들이 군자금을 납부하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하던 자이다.

1935년 7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살인 등 7개의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동년 9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출옥후 1946년 초에 부모를 찾아 길림성(吉林省) 통화현(通化縣)으로 돌아갔다가 심양9沈陽)에서 병사하였다.

장남 김세걸(金世杰)은 현재 심양시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원지
  • 한민족독립운동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집 3면
  • 동아일보(1934. 12. 8, 12. 29)
  • 본인자전서(1958. 6. 16)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09면
  • 매일신보(1935. 6. 3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진성 왕운기(王雲起), 김택기(金澤基) 황해도 곡산(谷山) -
본문
1914년 4월 16일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상도면(上圖面) 희엽리(希葉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왕운기(王雲起), 김택기(金澤基)이다. 조부는 1919년 평안북도 초산(楚山)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사망하였다.1920년 부친 김정일(金正一)을 따라 남만주(南滿洲) 류허현(柳河縣)으로 이주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부친 또한 항일운동을 이어가다 투옥되기도 하였고, 형도 재만 독립군 지휘관 최석순(崔碩淳)의 부하가 되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던 중 부상을 입고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겪는 등 집안이 모두 항일투쟁에 헌신하였다. 류허현에서 설립된 민족학교인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졸업하였다.1932년 6월 19세의 나이에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하였다. 국민부는 1929년 4월 1일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운동의 일환으로 만주에서 성립된 통합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는 산하에 이념과 무장활동을 실천할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조직해 1930년대 이후 남만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국민부 제2중대 소속의 참사(參士)에 임명되어 1934년 중반부터 김창화(金昌化)·김병하(金炳河)·강성채(姜成彩) 등 6명의 동지와 지안현(輯安縣) 외차구(外岔溝)에 파견되었다. 압록강과 접해있는 지안현은 국내로 진입하기 위한 독립군의 주요 통로였다. 국민부 지휘부는 이 지역에 독립군들을 파견해 안전한 진입로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고, 일제 또한 독립군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군경대(軍警隊)와 밀정들을 수시로 투입시켰다.국민부 파견대의 일원이 되어 지안현을 무대로 활동하던 중, 1934년 7월(음)경 밀정 김용환(金龍奐)을 처단하고 외차구에 있는 동포 김택규(金擇奎)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초산경찰대에 붙잡혔다. 위원군(渭原郡) 소속의 순사였던 김용환은 사직하고 만주로 건너와 밀정이 되어 독립군의 정황을 파악해 일제에 보고하는 한편, 이주 한인들을 선동해 독립군의 지원 활동을 막는 친일파였다.1935년 7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경성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1940년 8월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광복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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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2 인물카드 살인, 살인미수, 공갈, 공갈미수, 치안유지법, 불법감금 징역 무기, 20년 평양복심법원 1935-09-13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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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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