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한말에 경원(慶源)·갑산(甲山)·울진(蔚珍) 군수(郡守)를 지냈다. 1907년 이완용(李完用)·조중응(趙重應)·신기선(申箕善) 등의 주도로 설립된 유림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에 참여하였다. 11월 일진회(一進會)와 함께 활동한 군수 김기영(金璣泳)의 배척운동을 도모하였다. 이후 이의 소극성을 비판하였다.
스스로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있던 차도선(車道善) 휘하에 들어가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일어나고 있던 1907년 9월 일제가 ‘총포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여 포수(砲手)들의 총을 회수해갔다. 이에 분노하여 차도선은 같은 해 11월 홍범도(洪範圖)·송상봉(宋相鳳)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 등지에서 일본인 헌병·경찰 등과 친일인사를 암살하며 유격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좌봉은 김기학(金基學)과 함께 차도선의진의 도대장을 맡았다. 후치령 부근에서 포수(砲手) 약 300명과 함께 일본 군인·순사, 일진회원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8년 4월 초 북청경찰분서(北靑警察分署)가 홍범도·김기학·김좌봉 등에게 ‘귀순(歸順)에 관한 서면(書面)’을 보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리고, 서면을 가지고 간 사람을 밀정(密偵)이라며 붙잡았다. 이후 김기학 및 홍범도의 처(妻) 등과 함께 한때 붙잡혔다. 일제 측에서는 이들을 ‘폭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대토벌작전에도 검거를 피한 홍범도와 차도선 등은 남아있던 부대로 이끌고 중국 간도(間島)로 건너갔다. 포수단(砲手團)를 조직하여 다시 국내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1910년 당시 비밀리에 김좌봉과 김의학을 만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1920년에 김석태(金錫泰)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 갑산분단의 분단장(分團長)을 맡았다. 4월경 만주(滿洲)에 본부를 둔 대한광복단에 입단한 박형렬과 이치용이 국내에 분단(分團)을 설치하여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 선전문 배포 등의 목적으로 국내로 특파되었다. 11월경 김석태의 집에서 갑산분단을 조직한 것이었다. 분단장 김좌봉 아래에 김석태가 부단장, 김우봉(金佑鳳)이 재무계(財務係)를 담당하였으며, 제1지단장에 김래원(金來源), 제2지단장에 이신재(李愼在) 등이 활동하였다.
이렇게 만주와 국내를 오가던 갑산분단의 활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1921년 4월 김석태·김래원·이신재 등 120여 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당시 김좌봉과 김우봉은 군수까지 지낸 갑산의 자산가(資産家)이자 명망가라서 편의상 그 이름을 활용한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폭도(暴徒)에 관한 편책(編冊)(경찰국)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3)
- 동아일보(東亞日報)(1921. 4. 16)
- 독립신문(獨立新聞)(1921. 4. 30)
-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 1967) 분책(分冊) 제1권 567~57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641, 642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제5권 323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