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1운동 후
3.
4. 애국사상
5.
6.
7. 애국부인단 사건으로
※상기중 공적서는 대구복심원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함남 북청(北靑) 사람이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으로 있던 이정숙은 1919년 3월 중순 오현주(吳玄洲)·오현관(吳玄觀) 자매와 함께 정신여학교 학생과 지식여성들을 규합하여 투옥지사들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할 목적으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을 펴던 중 동년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총무 이병철(李秉徹)의 주선으로 최숙자(崔淑子)·김원경(金元慶)·김희열(金熙烈)·김희옥(金熙玉) 등이 주도·조직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로 확대·개편되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총재에는 오현관, 회장은 오현주가 선임되었으며 이정숙은 경성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동회는 이후 기독교회·학교·병원 등을 이용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회원들의 회비와 수예품 판매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동회는 1919년 9월 김마리아(金瑪利亞)·황애시덕(黃愛施德)을 중심으로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는 등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체제로 조직을 전환하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연통부(聯通府)의 역할을 대행하였으며 군자금 모집에 힘써 6천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또한 동회는 본부와 지부를 통해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대한총지부(大韓總支部)의 활동을 수행하였는데 이정숙은 적십자장(赤十字長)을 맡아 이를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이정숙은 1919년 11월 일경에 붙잡혀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이정숙은 1925년 2월 21일에 조직된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의 초대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852·85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2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28∼430·432면
- 판결문(1920. 6. 29 대구지방법원)
- 조선민족운동년감 49면
- 기펴수필 270면
- 고등경찰요사 192·19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2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8·4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