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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84
성명
한자 李奉昌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열투쟁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2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0세에 용산(龍山) 문창보통학교 입학(文昌普通學校入學) 4년 (後) 필학(畢學)하고
2. 1922년에 도일(渡日)하여 목하창장(木下昌藏)으로 변성명(變姓名)하여 왜정(倭情)탐지(探知)하고 1931년 1월에 상해(上海)로 건너가 임정 주석(臨政主席) 김구(金九)의 지도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한 후 왜황 격살(倭皇擊殺)선서(宣誓)하고 동년(同年) 12월 17일에 폭탄을 휴대(携帶)하고 도일(渡日), 익년 1월 8일 동경에 있는 좌좌목련병장(佐佐木練兵場)에서 만주(滿洲)의 괴뢰왕인 부의(賻儀)친병식(親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는 왜황(倭皇) 유인(裕仁)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히도 실패(失敗)함에 의사는 태연히 공중(公衆) 앞에 태극기(太極旗)를 내어들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고창(高唱)하고 조용히 포박(捕縛)되어
동년(同年) 9월 동경대심원(東京大審院)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3. 동년(同年)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형장(刑場)에서 사형(死刑)집행 당(執行當)함. 향년 3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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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0살에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하였으며 4년후 졸업하여 일본인 경영의 제과점 종업원으로 있다가 19세때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정거장에 운전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1931년 1월 중순,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일본말 섞인 한국말을 하며 임시정부를 일제가 부르던 식으로가정부(假政府)라고 하는 그를 수상히 여겨 문밖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구(金九)는 일단 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에게 그가 묶을 여관을 잡아주라고 일렀다. 며칠후, 그는 직원들과 함께 술과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으면서 취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누게 되었다. "당신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일개 문무관(文武官)도 죽이지 쉽지 않은데, 일왕을 죽이기가 어디 쉽겠소?" "내가 작년 동경에서 일왕이 능행(陵幸)한다고 행인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의 이 말은 당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던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얼마 뒤 그는 김구를 만나 그의 진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김구 단장을 감복시킨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인생관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사람은 뜨거운 동지애로 의기투합하였고 그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김구와 약 일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자금과 폭탄은 김구가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자신은 준비기간 동안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한달에 한번씩 김구를 만나 거사를 계획·준비하였다. 1931년 12월 그와 김구가 약속한 지 일년이 거의 다 되어 미주 동포사회에서 거사에 필요한 폭탄도 준비되었다. 폭탄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김홍일(金弘壹)을 시켜 상해 병공창(兵工廠)에서, 또 한 개는 김 현(金鉉)을 하남성(河南省) 유 치(劉峙) 장군에게 보내어 구해온 것이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그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함으로써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 이튿날 그의 장거를 위한 송별회가 있었으며 기념촬영이 있었다. 이때 김구는 비장감에 젖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하여 김구를 위로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면서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는 일본이름으로 가장하여 동경으로 출발하였다. 영천환(永川丸) 선편으로 신호(神戶)를 거쳐 동경(東京)에 도착한 그는 미장옥(尾張屋)여관에 묵으면서 일왕의 일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던 중, 12월 말경 그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동경 교외에 있는 대대목(大大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여 그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상해의 김구 단장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어 거사날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그는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행렬이 나타나자 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몸을 일으켜 일왕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 만을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그가 일왕 유인을 폭살시키는데 실패는 하였지만, 그의 장거는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다. 또한 그의 의거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전선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보산(萬寶山) 사건이래 한·중민의 감정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장거가 있자 1932년 1월 9일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동경발 기사로 이 장거를 즉각 보도하면서, "일왕이 불행히 맞지않았다"라는 표현을 하며 그들도 일왕이 폭살되지 않았음을 매우 애석히 여기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장거가 갖는 보다 중요한 의미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 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세계에 과시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김구동정관련건(총독부경무국) 500, 503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272면
  • 기려수필 418~421·42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92, 193, 19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92, 493, 496, 498, 505, 507, 509, 512, 517, 520, 527, 528, 531, 534, 8548, 550, 559, 561, 566, 569, 575, 595, 629, 642, 643, 663, 664, 697, 698, 73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604~606, 792, 793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0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689, 696~69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9, 70, 217, 244, 348, 369, 416, 425, 444, 44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2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248, 249, 599~602, 60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607, 6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90~95, 98, 10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35, 736, 738~743, 745, 75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449, 452, 4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491, 49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2권 25, 33, , 234, 254, 259, 369, 464, 469, 497, 4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35, 124, 12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3권 116, 117, 120, 408, 454, 45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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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봉창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 마쓰이 가즈오(松井一夫),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서울 일왕 처단 의거
본문
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원정 2정목(京城府元町 2丁目, 현 원효로 2가)에서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손씨(孫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금정(錦町, 현 효창동)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명으로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 마쓰이 가즈오(松井一夫),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를 사용하였다.1911년 8세 때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고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 191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가계를 돕고자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자가게 와다에세도(和田衛生堂)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1년 후 보다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약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1919년 8월에는 약국 일을 하다가 알게 된 일본인 단골의 소개로 용산역의 시용부(試傭夫)로 취직하였다. 처음 1년 동안 시용부에서 역부(役夫), 전철수, 연결수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일본인들의 빠른 승진에 밀리게 되었고, 직장 내에서 느낀 민족 차별과 차등 대우로 힘들어하다 1924년 4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이후 1년 반 동안 관왕묘(관우 사당) 보존 운동에 참여하고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 자치부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간이 국세 조사의 조사 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에 가면 차별 대우도 없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925년 11월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찾았지만 쉽사리 구하지 못하다가 1926년 2월 오사카 가스 회사 상용 인부로 취직하였다. 이때부터 일상 생활의 편의를 위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간사이(關西) 공업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하였다. 그렇지만 각기병으로 일도 학업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요양을 하면서 지인의 가게를 돕다가 1927년 5월 가스 회사로 복직했지만 오래 가지 않았고 부두에서 석탄 짐꾼으로 일하였다. 이곳에서도 민족 차별을 겪고 그만둔 후 1928년 2월 구리 제련 공장인 스미토모 신동소(住友伸銅所) 아마가사키(尼)ケ(崎) 출장소에 상용 인부로 취직하였다.그 해 11월 히로히토(裕仁) 일왕(日王)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친구 2명과 함께 교토(京都)에 갔다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지참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에 걸려 9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오사카와 고베(神戶) 일대에서 막노동을 하였으나 끊임없는 민족 차별에 괴로워하다 1929년 9월 도쿄(東京)로 이동하였다.도쿄에서 마쓰이 가즈오(松井一夫)라는 새로운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며 일자리를 전전했으나 심각한 불경기 속에서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1930년 11월 다시 오사카로 돌아갔다. 지인에게 중국 상하이(上海)에 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민단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떳떳하게 한국인으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12월 상하이로 건너갔다.1931년 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동호(金東浩)를 만났다. 자신의 경력을 소개하며 철도 관련 일자리 주선을 부탁했지만 영어나 중국어를 못 하면 취직이 힘들다며 거절당하였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명선(明善) 철공소에 대장장이로 취직한 후 4월경 다시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때 김구를 만났다. 김구로부터 임시정부의 주의, 강령 등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후 때때로 만나면서 더욱 이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폭탄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일본으로 가서 일왕(日王)을 죽이고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고, 김구는 가능한 한 후원하겠다고 답하였다.8월 말쯤 철공소를 그만두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악기점 점원으로 일하며 일본인 행세를 하였다. 그동안 김구는 자금과 폭탄을 준비하고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고, 12월 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이봉창의 일왕(日王) 폭살 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얻었다.1931년 12월 13일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의 첫 단원으로 가입하였다. 김구로부터 폭탄과 자금 300달러를 건네받고 나서, 양손에 1개씩 폭탄을 들고 선언서를 가슴에 걸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2월 17일 일본 우편선 히카와마루(氷川丸)에 승선하여 19일 일본 고베항에 도착한 후 바로 오사카로 갔다. 사흘 후 22일 도쿄로 갔다.12월 28일 신문 기사에서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々木)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열병식에 일왕(日王)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날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경비 부족으로 고생하다가 1월 4일 김구가 보내준 100엔을 찾고 1월 8일로 거사일을 정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1월 6일 사전 답사차 예행연습이 진행되고 있던 요요기 연병장을 찾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넓어 거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일왕(日王)이 연병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신분 노출을 우려하여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라는 새로운 일본식 이름으로 숙소를 옮기고 폭탄을 넣어 운반할 엿 상자를 사두었다.1월 8일 오전 8시 숙소에서 나와 연병장으로 향하였다. 들어가는 길목을 노렸으나 삼엄한 경비와 정확한 이동 경로를 파악하지 못해 나오는 길에서 거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몇 번의 장소 변경 끝에 모든 일정을 마치고 궁성으로 들어가려고 사무라다몬(桜田門) 쪽으로 다가오는 일왕(日王)의 행렬을 경시청 정문 앞에서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일왕(日王)이 타고 있다고 생각한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45분이었다.하지만 그 마차에는 일왕(日王)이 아니라 궁내부 대신이 타고 있었고 폭탄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차단된 채 동경지방재판소 검사의 취조를 받았다. 검찰은 형법 제 73조의 ‘대역죄’에 따라 최고 재판소인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하였다. ‘대역죄’란, “국가나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일본 왕실에 위해를 가한 행위뿐 아니라 모의나 계획 등 예비 행위만으로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것”이었다.9월 16일의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 받았고, 170여 명의 방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9월 30일의 선고 공판에서도 사형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지 불과 열흘 만인 10월 10일 도쿄의 이치가야(市ケ谷)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유해는 사이타마현(埼玉縣) 우라와시(浦和市)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광복 후 재일한인 단체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은 그의 유해와 가나자와(金澤)의 윤봉길(尹奉吉), 나가사키(長崎)의 백정기(白貞基)의 유해를 찾아 본부에 모셔두었다가 한국으로 봉환하였다. 1946년 6월 15일 김구는 부산에 도착한 세 의사의 유해를 맞아 해방자호(解放者號) 열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 해 7월 7일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원(孝昌園)에 안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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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인물카드 - - -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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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묘역 효창공원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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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열사 충혼탑 전라북도 고창군
2 사당 충렬사 전라북도 익산시
3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4 동상 이봉창의사 동상 서울특별시 용산구
5 사당 대한이산 묘 전라북도 진안군
6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7 사당 의열사 서울특별시 용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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