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함북 명천(明川) 사람이다.
일본 조도전(早稻田) 대학을 졸업 후 1944년 1월에 일본군 함흥 43부대에 강제 입대당하였다.
이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소위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지원이었지 실제로는 일제의 강요에 이한 것이었다.
평소 항일정신을 길러 왔던 그는 입대 직후 임영선(林永善)·이윤철(李允喆)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독립군대열에 참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3개월에 걸쳐 탈출에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망설이던 중 그가 조속한 탈출 결행을 촉구하게 되자 1944년 6월 2일에 부대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때 이들이 계획했던 함흥학병탈출은 일제가 학병제를 실시한 이후 국내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결행이었다.
부대탈출 후 목표지인 함남 장진(長津)을 경유 독립군 기지인 만주를 향하여 야간에 강행군을 하던 도중 이들의 탈출을 탐지한 일제 군경의 추격을 받게되어 그는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탈출을 촉구한 혐의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7월에 평양육군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 6월형을 선고받고 일본 구주 소창(小倉)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조국으로 구환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판결문(1944. 7. 17 평양사단군법회의)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35·8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