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運動) 이후 (以后) 천도교 (天道敎) 의 해외 (海外) 독립운동 계획 (獨立運動計劃) 에 의 (依) 하여 중앙총본부 (中央總本部) 의 밀령으로 신숙 (申肅) ,최동오 (崔東旿) 김의종 (金義宗) 이 대표자 (代表者) 로 선정되어 상해 (上海) 로 망명 (亡命) 함.
1919년 7월상해 (上海) 에서 통일당 (統一黨) 을 조직하여 경제부 (經濟部) 책임자 (責任者) 로써 국외 운동 상황 보고 (國外運動狀況報告) 및 자금 모집 (資金募集) 의 사명을 띄고 국내 (國內) 로 파견되었음. 입국시 (入國時) 국경 (國境) 에서 평북경찰부 (平北京察部) 에 피체 되었음.
연대미상 (年代未詳) 도산 (島山) 과 신숙 (申肅) 이 설립키로 한 비행기 선전 (飛行機宣傳) 사업 (事業) 기금 (基金) 을 마련키 위하여 재차 (再次) 입국 (入國) 하여 교 (敎) 로부터 55만원을 인수 (引受) 받아 상해 (上海) 까지 운반하였음.
연대미상 (年代未詳) 신숙 (申肅) 과 의논하여 대신상점 (大新商店) 을 경영하며 군자금 (軍資金) 을 조달하여 군사통일촉성회 (軍事統一促成會) 에 송부하였고 조선일보 (朝鮮日報) 봉천지국 (支局) 을 경영하며 자금을 모금하여 정의부 (正義府) 유격대장 김일파 (金一波) 와 상면 (相面) 하여 제공함.
1941년 낙양군관학교의 의용군 모집에 적극 협력하다가피체 되어 북면주 (北綿州) 재판소 (裁判所) 에서 5년형 (年刑) 을 받고 수감 중 해방을 맞이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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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7월
1941년 낙양군관학교의 의용군 모집에 적극 협력하다가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천도교 가정에서 자란 그도 천도교인으로서 신성중학교에서 신문화를 배우고 민족정신에 눈을 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천도교에 대표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해 왔다. 그러나 천도교의 명맥을 지켜야 된다는 교주 손병희의 교지를 받들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고, 다만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는 대표를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에 1차로 최동오(崔東旿)에 이어 그가 2차로 천도교를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파견되었으며, 3차로 신 숙(申肅)이 상해에 파견되어 천도교 상해교구실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고, 그는 경제 담당이 되어 자금 조달에 전념하였다. 이에 그는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출옥 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는 등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09·710·71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