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3.1운동때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고 선언문
3.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김해(金海)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의 장유면 무계리(長有面茂溪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4월 11일 김승태(金升泰)·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자기 동리사람의 동원과 태극기의 제작을 책임, 분담하였다.
4월 12일 동리사람 50여명을 동원한 김승태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무계리 장터로 들어온 것을 시발로, 다른 동리에서도 주동인물의 인솔아래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그 숫자는 3천여명이나 되었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자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당황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金善五) 등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자, 시위대열은 일시 후퇴하였다. 그는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재차 투석과 몽둥이로 그 건물을 파괴하고,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을 때려눕히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김해읍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 군경의 발포로 말미암아 시위대열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는 그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부산(釜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는데, 복역 중, 손톱과 발톱을 뽑히는 등 잔인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속에서 지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493면
- 3·1운동실록(이용락) 62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0면
- 수형인명부(장유면장 발행)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18∼22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4권 47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