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1919년 3월 1일 목포에서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東京)에서 거사된 2·8독립선언식에 참가하고 귀국한 유학생 남궁 혁(南宮赫)에 의하여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운동사실은 물론 민족자결주의론(民族自決主義論)과 세계정세가 전해져서,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진지하게 의견이 교환되고 있었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이 있은 후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목포에서 남궁 혁·오도근(吳道根)·김영주(金永周)·권영례(權寧禮)·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 등의 청년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목포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강석봉(姜錫奉)·양병진(楊炳震) 등과 기독교인들이 그들대로 별도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고 기독교측과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태극기와 경고문을 제작·등사하여 개별적으로 주민들에게 배부하였다.
또한 각 구역별로 책임을 주어 인원 동원을 분담할 때 그는 목포 상업학교 학생동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거사일인 1919년 4월 8일 오전 10시경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영흥·정명학교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1백 50여명의 목포상업학교 학생들도 이에 가세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니 목포의 거리는 온통 독립만세소리로 가득차게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니 놀라고 당황한 일본 경찰과 기마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고 광분하였는데, 잔혹한 일제는 서상봉의 양팔을 칼로 쳐서 피바다를 만들었으며 무려 80여명을 잡아 가두었다.
그는 동생인 상술(相述)·상오(相五)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손발이 묶인채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동생 상술은 극심한 고문으로 끝내 정신이상이 되어 자살하는 통한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10·611·61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2·15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