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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620
성명
한자 朴相烈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년 3.1운동 당시(運動當時) 목포지방(木浦地方) 총책임자(總責任者)로서 삼형제(三兄弟)(共)거사(擧事)참가(參加)하였고 이를 위하여 사재(私財)전부(全部) 제공(提供)하여 왜경(倭警)에게 (甚)옥고(獄苦)(當)하였고 (后)에는 중국(中國)으로 망명(亡命)하여 임정자금 조달(臨政資金調達)에 큰 공훈(功勳)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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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1919년 3월 1일 목포에서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東京)에서 거사된 2·8독립선언식에 참가하고 귀국한 유학생 남궁 혁(南宮赫)에 의하여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운동사실은 물론 민족자결주의론(民族自決主義論)과 세계정세가 전해져서,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진지하게 의견이 교환되고 있었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이 있은 후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목포에서 남궁 혁·오도근(吳道根)·김영주(金永周)·권영례(權寧禮)·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 등의 청년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목포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강석봉(姜錫奉)·양병진(楊炳震) 등과 기독교인들이 그들대로 별도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고 기독교측과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태극기와 경고문을 제작·등사하여 개별적으로 주민들에게 배부하였다.

또한 각 구역별로 책임을 주어 인원 동원을 분담할 때 그는 목포 상업학교 학생동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거사일인 1919년 4월 8일 오전 10시경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영흥·정명학교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1백 50여명의 목포상업학교 학생들도 이에 가세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니 목포의 거리는 온통 독립만세소리로 가득차게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니 놀라고 당황한 일본 경찰과 기마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고 광분하였는데, 잔혹한 일제는 서상봉의 양팔을 칼로 쳐서 피바다를 만들었으며 무려 80여명을 잡아 가두었다.

그는 동생인 상술(相述)·상오(相五)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손발이 묶인채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동생 상술은 극심한 고문으로 끝내 정신이상이 되어 자살하는 통한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10·611·61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2·15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상렬 - 전남 목포(木浦) -
본문
1897년 1월 8일 전라남도 목포부(木浦府) 창평정(昌平町)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목포에 거주하며 미곡상을 운영하였으며, 그 해 4월 목포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목포에는 1919년 3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학하던 남궁혁(南宮赫)에 의해 2·8독립선언 등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사실이 전해졌다. 이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져 지역 내 학생들 사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에 남궁혁·권영례(權寧禮)·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오도근(吳道根)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기획하였다. 목포공립상업학교(木浦公立商業學校) 학생들의 참여 독려와 조직을 맡고, 오재복·이금득·박상오(朴相五)는 목포공립보통학교(木浦公立普通學校)를 담당하기로 하였다.한편 양동교회(陽洞敎會)를 중심으로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강석봉(姜錫奉) 등 기독교인들 또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기독교계 학교인 영흥학교(永興學校)·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재학생, 졸업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청년들과 기독교인들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경고문을 등사하며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4월 8일 거사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시장의 상점들은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철시하기로 하였다. 4월 7일 밤 거사를 준비하던 일부 인사가 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검거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주도자들이 8일 새벽부터 선언서, 태극기, 경고문 등을 집집마다 투입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4월 8일 오전 10시부터는 기독교인들이 영흥학교·정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50여 명의 목포상업학교 학생들도 거리에 나와 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12시, 일본 경찰의 시위 진압으로 인하여 시위 군중이 잠시 해산하였지만, 오후 2시에 죽동(竹洞)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때 80여 명의 시위 참여자와 함께 붙잡혔다.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다음날 9일 정오 죽동 방면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으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와 목포경찰서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무죄를 받았으나, 원심 검사가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 해 7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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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원판결 취소) 집행유예 2년 대구복심법원 1919-07-1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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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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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탑 전라남도 목포시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독립 기념비 전라남도 목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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