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장성(長城)사람이다.
가세가 빈한하여 학문을 익히지 못하였지만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였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금치 못하고 1896년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격문이 전하여지자, 아는 포사(砲士)들에게 충의로 타일러서 널리 포섭하여 금성(錦城)과 광산(光山)사이에서 기의하니 고을 사람들이 글 읽지 않은 선비(不讀書學者)라 하였다.
1896년 2월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의 의진에 속하여 활약하였다. 이즈음 김익중은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에게
"지금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기가 한 털에다 천 근의 무게를 단 것처럼 되었으니 마땅히 일찍 스스로 계책을 내어 훗일에 일할 준비를 해야겠으나, 그럴 계기가 없으니 나는 향약(鄕約)을 복구하여 시행한다는 핑계로 시설을 하여 보겠노라"
하였다.
실제로 그는 고을과 동리에 두루 권유하여 매월에 한 번 모여 독법(讀法)하고 강약(講約)하여 명분(名分)을 정하고 상벌을 시행하였다.
이때 호남 의진은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활약하였다. 모군하는 한편 각기의 부서를 확정하였는데 기삼연은 호남 창의 회맹소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참모에 김엽중(金燁中)·김봉수(金鳳樹) 그리고 종사에는 김익중을 비롯하여 서석구(徐錫球)·전수용(全垂鏞)·이석용(李錫庸)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김익중의 호남 의진에서의 역할 중에 괄목할 만한 것은 대중적 기반을 다져 준 것이라 하겠다. 유생 계열 의진은 대중적 기반이 약하였던 것이 가장 큰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김익중은 포수와 보부상(褓負商)들을 의진에 참여시키고자 진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정미조약의 체결과 군대해산이 있게 되자 김익중은 다시 의거를 일으켰다.
이때도 기삼연의 의진에 소속되어 작전을 수행하였으므로 참모장이 되었다. 무사 수백 명을 거느린 대의진이 구성되었다.
9월 호남의진은 영광(靈光)의 수연산(隨緣山) 속에서 기치를 내걸고 국내의 대소민인(大小民人)에게 격문을 고하고 소(疏)를 지어서 예식원(禮式院)에 바쳤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에 글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제물을 갖추어 석수산신(石水山神)에게 제사지내고 피를 마시며 군중에게 맹세하고는 통곡하니 온 군중이 눈물을 흘렸다.
나라의 현실과 미래를 근심하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9월 26일 고창을 공격하여 성을 점거할 수 있었다. 김익중은 기삼연·김준·이남규·유인수와 더불어 적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2, 3시간만에 적의 장교 여러 명을 죽였다.
밤에 또 적의 병참을 공격하여 적의 병기를 노획하였으나 아군의 피해는 적었다. 그러는 중에 군대와 떨어져 외로이 있던 중 김익중과 이남규(李南圭)가 적의 탄환을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7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11·666·667·677·641·692·693·69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