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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387
성명
한자 趙崗濟
이명 巴山高芳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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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40.11.30「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 문예부(文藝部)」에 가입하여 민족의식 앙양 등 독립운동을 한 자로서 1941.9월 하순 일경(日警)에 피검 1943.11.30 대전지방법원(大田地方法院)에서 징역2년6월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 복역한 후 1945.2월경 만기(滿期) 출옥(出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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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0년 11월 30일에 동교의 항일결사 문예부(文藝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문예부는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비판 등의 운동방침을 정하고 1940년 11월말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지며 독립의식을 길러갔다.

그후 그는 1941년 3월에 동교를 자퇴하고 고향인 함안에 내려가 사설강습소를 열고 농촌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예심종결결정(1943. 2. 8 대전지방법원)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01·805·811·814·826·828·82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조강제 창씨명 : 파산고방(巴山高芳) 경상남도 함안(咸安)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본문
1923년 3월 30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대산리(大山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파산고방(巴山高芳)을 썼다. 대구사범학교에 재학하였다. 1939년부터 독서토론을 통해 국제 정세를 분석하며 독립을 위한 학생운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패망과 독립을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940년 11월 이태길의 하숙방에서 대구사범학교 5학년 박효준(朴孝濬)·강두안(姜斗安)·박찬웅(朴贊雄), 4학년 류흥수, 이동우(李東雨), 3학년 김근배(金根培) 등과 함께 비밀결사 결성에 관해 논의하였다. 민족의식 앙양과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자는 박효준의 제의에 참석자들과 함께 동의하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문예부는 학교 당국과 일제 경찰의 감시와 경계를 피하려고 겉으로 문예 활동을 표방하며 활동하였다. 1940년 11월 하순부터 1941년 2월 초까지 장소를 옮겨 다니며 회원 각자의 작품을 비평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토론하며, 당시 시국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1941년 3월 민족의 발전을 위해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잡지 『학생』을 발행하였다. 1941년 2월 8기생인 5학년들은 졸업을 앞두고 박효준·이태길·문홍의 등과 함께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지속시키기 위해 졸업한 뒤 각기 부임할 학교의 우수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 박효준에게 매월 1회 활동 상황을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쓴 문예 작품으로 『반딧불』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8기생으로 충남 홍성(洪城)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소지하고 있던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 일로 대구사범학교 관련자 300여 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2년여 동안 미결수로 옥고를 겪었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 단기과정을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1952년 11월 26일 전사하였다. 당시 계급은 소령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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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함안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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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대구광역시 달서구
2 사적지 대구학생 운동지 대구광역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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