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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37
성명
한자 白南埰
이명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3.1운동 당시 대구계성중학교(大邱啓聖中學校) 교감(校監)으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인쇄 등에 활약하고 2년형을 복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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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권의윤(權義允)·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교사인 그는 경상도 독립만세운동의 연락책임자로 2월 24일 대에서 내려온 이갑성(李甲成)과 제일교회에서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전해 듣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어 그는 이만집·김태련·김영서·권의윤·이상백(李相柏)·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 등과 만나, 서문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주민과 학생의 동원을 책임분담 하였는데, 그는 계성중학교 학생의 동원을 담당하였다. 한편 ·대구고보(大邱高普)·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학교) 학생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연합시위를 전개하도록 약속하였다.

3월 6일에는 김태련 등에 의해서 이갑성이 보낸 독립선언서가 등사되고, 대·소의 태극기 40여매가 제작되는 등 사전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불행히도 그는 이튿날 일제의 예비 검속 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가 주동하여 계획한 독립만세운동은 예정대로 추진되어,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그는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2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47·348·350·35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69·27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64·1268·1269·127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백남채 자 성숙(聖淑), 호 백천(白泉), 석천(石泉) 경북 대구(大邱)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본문
1888년 1월 1일 경상도 대구부(大邱府, 현 대구시)에서 아버지 백용규(白龍逵)와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자는 성숙(聖淑)이며, 호는 백천(白泉)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를 졸업하고, 1910년 22세 때 중국 교와대학(協和大學, 현 北京大學)에 유학하였다.중국 유학 후 귀국하여 1915년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박영조(朴永祚) 등과 함께 교남기독교청년회(嶠南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회 사업을 하였는데, 교남기독교청년회는 1921년 대구기독청년회(YMCA)로 전환되었다. 1918년 계성학교의 교감 및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19년 1월 5일 대구 남산교회(南山敎會)의 장로로 시무하였다.1919년 2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귀국한 서병우(徐丙佑)·김순애(金順愛)·아우 백남규(白南圭), 대구의 홍주일(洪宙一)과 이만집,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에 참가한 후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김마리아(金瑪利亞) 등과 함께 국내에서 거사할 것을 준비하였다.1919년 3월 2일 이갑성(李甲成)이 보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백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남산교회 목사 이만집과 남산교회의 전도사 김태련, 그리고 신정교회의 장로이며 대구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金永瑞) 등은 3월 8일 오후 3시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김태련의 요청을 받고, 3월 6일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과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중, 3월 7일 일제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집을 수색당하고 경찰서에 붙잡혀갔다.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는데, 그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풀려난 후 남산교회 장로로 시무하며 조양연와회사(朝陽煉瓦會社)를 설립하여 경영하면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계성학교의 재정 지원에도 크게 기여하였다.1923년 대구의 유지들이 조직한 대구구락부(大邱俱樂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대구 학교 평의회(大邱學校評議會)의 후보(候補)로 나서기도 하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창립에 참여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7년 5월부터 1930년 4월까지 대구 학교 평의회 의원(議員)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부터 1930년까지 2년 동안 대구상업회의소(大邱商業會議所) 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타협적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이후에도 대구지역에서 계속 활동하였으나, 전시 체제하에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일제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2년 대구지방법원 1919-04-1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2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5-31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7-2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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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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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대구 교남YMCA회관 대구광역시 중구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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