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서영완은 1898년 7월 7일 경상남도(慶尙南道) 부산(釜山) 영주동(瀛州洞)에서 출생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학년 재학 당시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참석하여 독립만세를 불렀고, 종로에서 무교동을 거쳐 대한문(大漢門)을 거쳐 미국영사관까지 만세시위를 하였다. 3월 5일에도 만세시위에도 참여하기 위해 아침 10시 경 집을 나섰으나, 시간이 늦어 무교동 쪽에서 만세를 부르는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서영완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종로로 나갔고 정동의 이학학당(梨花學堂) 앞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영완은 6월 21일 일제의 신문을 받을 당시, “지금의 합방 상태에서는 여러 가지로 조선인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다. 따라서 나의 종교상의 자유생활도 제한을 받을 것이 분명하니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다.”라고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유를 대답하였다. 그는 1919년 8월 30일 예심을 받고,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이후 서영완은 조선청년회연합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22년 4월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고, 또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당시 상하이(上海)에는 각지에서 모인 청년들이 당파에 관계없이 시국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였다. 서영완은 1922년 6월 12일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유호청년회(留滬靑年會)의 발회식에 참석하였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조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조직되었다.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주비회가 회의 소집을 선언했다. 국민대표회주비회에서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참가대표를 지방대표와 단체대표로 나누었다. 이때 서영완은 조선청년연합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1922년 6월 8일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 모이당(慕爾堂)에게 개최된 연설회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적극 후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민대표회주비회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예비회의를 거쳐, 1923년 1월 3일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미국인 예배당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정식으로 개최되었다. 서영완은 3월 5일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연설을 하였으며, 이유필(李裕弼) 등과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정부를 개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총 63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으나 의견이 대립되어 여러 차례 회의가 유회되다가 5월 15일 회의를 끝으로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5월 16일 제64회 회의에서 개회 벽두에 서영완 등 10여 명이 “회의를 부인하노라”하고 회의에서 탈퇴한다고 선언을 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인 1923년 7월 2일 임시헌법 기초위원회를 조직되자 서영완은 임시헌법개정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23년 12월경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중가주(中加州) 지방에 정착하였고, 1944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중가주지방회 서기에 임명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11. 6)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11) 별책5 336~357면·별책6 74~78, 98~101, 109~111, 112~11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