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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028
성명
한자 鄭相正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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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년 4월 6일 경남 하동군 고전면에서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고 1,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경찰의 총검과 제모(制帽) 제복(制服) 등을 탈취하고 귀가하였다가 익일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아 복역하다가 옥중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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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의 고전면 주교리(古田面舟橋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박영묵(朴永默)·정의용(鄭宜鎔) 등 33인과 더불어 일신단(一身 )을 조직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4월 6일의 주교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인 정재기(鄭在基)에게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가 도중에 체포되어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게 되었다.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1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박영묵이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신단원 및 장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과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시위군중은 그들의 총검을 탈취하는 한편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구타하였다.

그러나 급거 응원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로 시위대열은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성천리(城川里) 지소부락(紙所部落)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동리 뒤의 삼봉산(三峰山)으로 대피시킨 뒤, 박용묵·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5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수형인명부(하동군 고전면장)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82·28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정상정 자 : 선중(善中),호 : 석정(石亭) 경남 하동 후기의병, 1919년 하동군 고전면 만세운동
본문
1878년 10월 10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君) 고전면(古田面) 성천리(城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자는 선중(善中)이며, 호는 석정(石亭)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7년 유명국(柳明國)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고, 1919년 고전면 주교리(舟橋里) 장날 배다리시장(舟橋市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07년 무렵 유명국 의병부대에 합류해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였지만, 의병장으로부터 노부모를 봉양하라는 명령을 받고 항일투쟁을 중단하고 귀향하였다. 1919년 하동군 고전면에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박영묵(朴永黙)·이종인(李宗仁)·정의용(鄭宜鎔)·정윤용(鄭潤鎔)·추홍순(秋鴻順) 등과 함께 33명으로 구성된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였다. 일신단 동지들과 함께 고전면 주교리 장날인 4월 6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6일 동지들과 함께 장꾼 등으로 가장하여 지게를 지거나 농립을 쓰고 주교리에 위치한 시장에 도착하였다. 오후 1시 40분경 시장에는 약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박영묵이 단상으로 올라가 만세시위의 취지를 연설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일신회 동지들과 함께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며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주교리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제 군경과 한국인 경찰 박도준(朴道俊)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일신단 동료들과 함께 일제 군경과 박도준에게 달려들어 총검을 빼앗고 제압한 후, 그들의 제복과 모자를 벗겨 버렸다. 그러자 시위대의 기세는 더욱 올라갔지만, 이후 추가로 투입된 일제 군경의 강제 진압으로 시위대와 함께 강제로 해산되었다. 다음날인 4월 7일 다수의 일제 군경이 주도자 색출과 검거를 실행하기 위해 총을 난사하면서 마을로 들어왔다. 이때 부녀자와 아이들을 먼저 마을 뒷산인 삼봉산(三峰山)으로 대피시킨 후, 마을 장정들과 함께 일제 군경의 강경 진압에 대비하였다. 일제 군경이 마을에 접근하자 만세시위를 주도한 일신단 동료 박영묵·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자진해서 주도자임을 밝히며 붙잡혔다. 1919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옥고를 겪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9월 29일 진주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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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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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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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3·1독립운동 의거 기념비 경상남도 하동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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