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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76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董敏秀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14 함북 명천군 화태동(花台洞) 5,000여 군중의 만세시위에서 동포들이 일인(日人)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15 만세시위에 앞장서서 헌병대에 살도(殺到)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면장을 내놓으라고 항거 중 일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사살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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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 사살(射殺) : 활이나 총 따위로 쏘아 죽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함경북도 명천(明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의 하가면 화대동(下加面花臺洞)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는 3월 14일 함경북도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중 최대 인파인 5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화대헌병분견소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한 곳이다.

이러한 만행사실을 들은 주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는데, 이때 박승룡(朴承龍)·김성련(金成鍊)·허영준(許英俊)·김하용(金夏鏞) 등이 주동이 되어, 다시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3월 15일 다시 5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화대장터에 모였는데, 이때 그는 오랜 병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날의 시위 때 동포가 일제의 흉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고 결연히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하가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주민들을 괴롭혔던 면장 동필한(董弼漢)을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니, 겁에 질린 면장은 헌병분견소로 도망쳤다.

이에 시위군중은 헌병분견소에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장을 내 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길주(吉州) 헌병대에서 지원나온 제27연대 소속 기마헌병 13명이 경찰과 함께 시위군중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이때 선두에 섰던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광천동민세보 6권(1925. 6. 21 발간 : 순의기록)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751·75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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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동민수 - 함북 명천(明川) 명천군 하가면 만세시위
본문
1872년 2월 3일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하가면(下加面) 지명동(池明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천(廣川)이다. 1919년 3월 명천군 하가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1919년 3월 14일 오전 11시 하가면 화대동(花臺洞) 화대 장터에서 명천군의 만세시위가 처음 전개되었다. 이날 만세시위는 바로 인접한 지역인 길주군(吉州郡) 길성면(吉城面, 이후 길주읍)에서 전개된 3월 12일 시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만세시위에는 5,000여 명이 참여하였는데, 이는 함경북도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헌병들은 헌병분견소 앞으로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발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5명이 사망하였다.이튿날인 3월 15일에는 다시 화대 장터에서 김성련(金成鍊)·김익련(金益鍊) 형제와 김상훈(金相勛)·최우용(崔禹鎔)·현용묵(玄龍默) 등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상가면(上加面) 조당동(潮塘洞)에 출발하여 화대 장터로 행진하였다. 화대 장터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대를 이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아픈 몸을 이끌고 화대 장터로 가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하가면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면장 동필한(董弼漢)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동필한은 시위대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위대가 그를 구타하였다.동필한이 화대 헌병분견소로 도망치자 시위대는 헌병분견소 앞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한편, 분견소 안에 숨어있는 동필한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분견소의 헌병들과 길주헌병대(吉州憲兵隊)에서 파견된 제27연대 소속 기마 헌병 13명이 합세하여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차녀인 동풍신(董豊信)이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화대 장터로 달려와 만세시위를 다시 이끌었다. 기마 헌병 파견을 요청한 것이 동필한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위대는 다시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동필한의 집과 회계원의 집도 불태워 버렸다. 이 일로 동풍신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일제의 고문 끝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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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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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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