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6월 12일
3. 1919년 7월 19일
4. 1919년 9월 15일 밤에
5. 1919년 11월
6. 1920년 3월 8일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일찍이 중국 남경(南京)에 유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함경도 대표 의원에 선출되어 이춘숙(李春塾) 임봉래(林鳳來) 강태동(姜泰東)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6월 여운형(呂運亨)에 이어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의 단장이 되어 폭탄제조 기술을 익히고 무장항일 투쟁을 결행하였다. 그는 김태연(金泰淵) 이춘숙(李春塾) 김정근(金政根) 이영열(李英烈) 등 단원들과 함께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 안에서 비밀히 폭탄을 제조하였다. 동년 9월에는 이종암(李鍾巖) 곽재기(郭在驥)와 함께 만주 길림(吉林)으로 가서 폭탄제조법을 전습(傳習)하였으며, 1920년 1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을 적극 지원하여 밀양(密陽)경찰서 투탄(投彈) 등 의열활동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1920년 초에는 다시 상해로 돌아와 프랑스조계 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임득산(林得山)과 같이 폭탄을 제조 중 잘못하여 폭발하는 바람에 그의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하였으며,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의원으로서 계속 임정에 참여하였다. 1921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신규식(申圭植)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여운형(呂運亨) 김인전(金仁全) 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외교연구회원이 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1925년 9월 여자 관계로 인한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부득이 상해를 떠나 귀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3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201 203 208 224 303 3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72 313 3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155 164 175 181 190 242 285 486 631 63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00 392 40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0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6 23 42 61 74 8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1 239 339 36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0면
- 고등경찰요사 88 97면
- 기려수필 300 301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5 35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5 4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 9 38 420 441 445 478 488 489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 48 54 144 162 212 215 353 360 407 446 469 484 57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50 56 59 62 68 73 74 81면
- ·동아일보(1925. 9. 25, 9. 26, 9. 27, 9.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