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대한국민의회 의장서리 및 회장, 노동재무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의용군 편성, 무장독립투쟁, 3.1독립선언 기념 시위 등을 주도하였다.
일찍이 부모와 함께 러시아로 이주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니콜리스크한인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1919년 1월경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노농정부 집정관 중 한 명인 아우크센체프로부터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제의받고 최재형(崔才亨) 등과 논의하여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같은 달 28일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최재형, 김철훈(金喆勳) 등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임원들과 회합하여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논의하고 임시정부의 러시아 이전을 계획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국민의회 임시총회에서 문창범(文昌範)의 뒤를 이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의장서리로 선출되어 의용군(義勇軍)을 편성하고 3.1독립선언 기념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습격하여 한민학교를 불태우고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회장 최재형 등 90여 명을 사살하자, 그는 전 러시아 육군소장 출신 김인수(金仁洙), 한 안드레이와 함께 무루나이구베스케에서 노동자 등을 결집했다.
9월에는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노동재무부장으로서 문창범 등과 함께 무기와 탄약 등을 입수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1920년 10월 평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같은 해 겨울 만주지역 독립군의 노령 이주문제가 논의되자, 문창범, 오하묵(吳夏默) 등과 하바로프스크 소재 제2군단과 교섭을 진행하여 1921년 1월부터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이만으로 이동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2월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밀정 처단,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講和會議와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건(1919. 2. 7),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건(1919. 2.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黑龍州 鮮人 빨치산에 관한 건 외 11건)(1920. 10. 14),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 (金萬謙에 관한 건 외 8건) (1920. 10. 21),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親日鮮人靑年團에 관한 건 외 3건) (1920. 12. 22),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李東輝의 아들에 대한 美國宣敎師의 學資援助에 관한 건 외 13건) (1921. 1. 20),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基督靑年會의 활동과 羅景錫에 관한 건 외 11건) (1921. 2.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1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1919. 4. 29), 露領 鮮人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1919. 5. 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 國外情報(獨立宣言紀念祝賀式 거행에 관한 건 외 2건)(1920. 2. 28),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1920. 2. 29), 韓國獨立宣言紀念會에 관한 건(1920. 3. 5), 國民議會 役員選擧의 건(1920. 3. 3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9
- 鮮人의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건(1920. 3. 5)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7
- 鮮人의 不穩文書 發見에 관한 件(1921. 4. 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 1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10집 368면·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제5권 413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