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함남 홍원(洪原) 사람이다.
1920년대 초에 만주지역에서 광정단(光正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0년대 중반에는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가 가입하여 활동하던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정의부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金東三), 재정분과위원 김호(金虎)·윤덕보․승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김이섭이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磐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吉林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조직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자치활동에, 1926년 초 군민대표회의가 조직되어 무장파가 득세하였을 때는 군사활동을, 1926년 말 다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을 때부터 1929년 3월 해체될 때까지는 자치활동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
김이섭이 참여한 정의부는 조직 당시부터 자치활동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므로 정의부에서는 실업증진, 교육․선전활동, 재정기반의 확대 등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정의부의 식산흥업 부분에 대하여 알아보면, 정의부는 흥업실업사를 설립하여 경농과 정미업을 개시하였고, 중국 당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동포의 농사자금 마련과 농사의 지도, 장려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농민조합과 같은 민간단체인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도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각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중등교육을 위하여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에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유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 길림성 화전현 성내(城內)에 화성의숙(華成義塾), 유하현 왕청문에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의부의 이러한 교육은 중국동북정권이 신교육령을 제정 반포하여 재만한인들에게 중국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의부에서는 선전활동을 위하여 잡지와 신문도 간행하여 재만동포의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6년 9월에는 선전기관으로서 대동민보사를 설치하고 정의부의 기관지로서 「대동민보(大東民報)」를, 1926년 9월 15일부터 발행하였다. 아울러 정의부에서는 대동민보사 발행으로 1927년 1월 1일부터 『젼우』라는 국한문 혼용의 잡지도 간행하였다.
한편 정의부의 지도자 현익철은 1927년 겨울 재만조선인구축문제강구회를 조직, 동북 각성 및 북경 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교섭하게 한 결과 한인구축 문제를 완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령관 아래 중대와 소대를 두었다. 이들 군사부는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 또는 대한제국 군대 출신의 김창환(金昌煥), 그리고 오동진 등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이형(鄭伊衡)․문학빈(文學彬)․양세봉(梁世奉) 등 평안도 출신들이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김이섭도 활동한 정의부의 군대활동은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활동, 독립선전공작, 주구 암살, 일본 관리의 사살, 적기관 방화공작 등이었다. 한편 정의부는 부내의 모든 장정에 대하여 의무병제를 실시하였으며, 상비군으로서는 8개 중대와 민경대(民警隊)를 두었고, 1927년에는 7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과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립하여 모든 장정과 재향군인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정의부의 명령에 따라 김이섭은 1925년경 함남 삼수군(三水郡) 호인면(好仁面)에서 일제의 앞잡이인 주재소 순사 김원봉(金元鳳)을 사살하였다.
김이섭은 그 후에는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하였다. 국민부는 1930년대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는 1928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있었던 3부통합회의가 실패한 후, 동년 12월 신민부(新民府) 군정파(軍政派)와 정의부 탈퇴인사, 그리고 참의부(參議府) 주류세력들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자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참의부 심용준파(沈龍俊派), 신민부 민정파(民政派)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29년 3월부터 새로운 군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회의를 길림성(吉林省)에서 개최하고, 1929년 4월 1일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해체를 선언하고, 새로이 조직한 단체이다.
국민부에서는 1929년 5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을 결정하였는데, 당시 선임된 간부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 민사위원장 김이대(金履大), 경제위원장 장승언(張承彦), 외교위원장 최동오(崔東旿), 군사위원장 이웅(李雄), 교육위원장 고이허(高而虛), 법무위원장 현정경, 교통위원장 김돈(金敦), 중앙집행위원 김진호(金鎭浩)·심용준·이일세(李一世)·이동림(李東林)·황기룡(黃起龍)·고활신, 사령관 이 웅, 1중대장 양세봉, 2중대장 윤환(尹桓), 3중대장 이태형(李泰馨), 4중대장 김창헌(金昌憲), 5중대장 장철호(張喆鎬), 6중대장 안홍(安鴻), 7중대장 차용륙(車龍陸), 8중대장 김보국(金保國), 중앙호위대장 문시영(文時映) 등이었다.
이러한 조직을 가진 국민부에서 활동하던 중 김이섭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 12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사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0. 12. 30 함흥지방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17면
- 동아일보(1930. 12. 22, 1931. 2. 12)
- 조선일보(1931. 2. 9, 2. 11)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