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1919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소속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3.1운동을 계기로 보다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주로 의병운동 계열에 의해 조직되었다.
1919년 4월 만주 각 현(縣)에 흩어져 있던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각 단체를 해산하고 결성하였으며,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이념으로 하였다.
본부를 유하현 삼원포에 두었으며, 도총재 박장호(朴長浩), 부총재(副總裁) 백삼규(白三圭)였으며, 도총재부 산하에는 사무기구로 총단이 있었는데 총단장에 조맹선(趙孟善), 부단장에 최영호(崔永浩), 김원섭(金元燮)이 활동하였다.
국내외에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만주지역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는 관구(管區)를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남만지역의 환인(桓仁),장백(長白),무송(撫松),임강(臨江),관전(寬甸),집안(輯安) 등 10개 현에 지단을 세웠다.
이후 1923년까지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거쳐 의군부(義軍府)로 발전하였다.
김원섭은 1919년 대한독립단 집안환인총지단장(輯安桓仁總支團長)으로 활동하던 중 동단(同團) 소집위원(召集委員) 맹헌규(孟憲奎)가 중국경찰에 체포되자 동년(同年) 10월 집안현(輯安縣) 경찰소장에게 맹헌규 석방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동년 11월 동단 제1중대장에 선임되어 환인현(桓仁縣)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 동단 중앙총무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밖에 김원섭은 1916년 가을 이진룡,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영변군 팔원면 용성동(龍城洞) 말씹 고개에 잠복하여 평양으로부터 운산(雲山) 북진(北鎭)으로 돌아오는 송금(送金) 마차에 대한 기습공격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체포된 김원섭은 평양감옥에서 5년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남만(南滿)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병서(病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排日鮮人 狀況報告의 건(芝崎路可(海龍分館主任), 1919. 11. 26) 機密公 제17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14)
- 西間島 不逞鮮人團의 상황(朝鮮總督府 警務總長, 1920. 12. 27) 高警제41, 242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25)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권 184~18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3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6면
- 鴨綠江 沿岸地方 不逞鮮人 狀況에 관한 건(赤塚正助(奉天總領事), 1920. 6. 23) 機密公 제72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18)
- 朝鮮人槪況(關東廳警務局, 1922. 5. 22), 機密受제308호-關機高發 제7394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2)
- 독립신문(1921. 4. 2)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일본육군성)(4),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