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용만은 1910년대 후반 서간도 독립군기지에 만들어진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신흥학우단은 서간도 독립군기지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교직원과 졸업생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신흥학우단 단원 김용만은 1919년 8월 하순 김노원(金魯元)·김동산(金東山)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교실에서 국내에 진입하여 일제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들을 척결할 방략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거사에 사용할 폭탄을 제조하기로 약속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한편 이같이 서북간도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줄기차게 조국 독립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자, 일제는 1920년 10월 이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이주 한인을 참혹하게 탄압한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1925년 6월 11일 중국측과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을 맺어 본격적으로 재만 한인사회를 탄압하였다. 삼시협정의 내용은 중국측이 한인 독립운동자들을 체포하여 일제에게 넘긴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협정이 맺어진 후 중국측은 혹독하게 독립군 및 이주한인을 탄압하였다. 군·관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간인들까지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 바로 이웃에 사는 한인들을 살해하거나 무력으로 끌어다 일제측에 넘겼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측의 이 같은 야만적 행태 때문에 수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따라서 이를 견디다 못한 한국 독립군들은 중국의 관공리들을 향해 여러 장의 통고문을 보내 그들의 행위를 규탄하고 이 같은 행위가 계속 이어질 때는 바로 중국측이 독립군의 적임을 명시했다. 통고문 하단에는 그때까지 중국측에 의해 목숨을 잃은 독립군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서간도를 무대로 독립군기지 건설 초기부터 활동했던 김용만도 이같은 중국측의 탄압에 의해 1927년 집안현에서 피살(被殺)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料(국가보훈처) 중국편 제19집 216~220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4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1집 86~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929면
- 東亞日報(1927. 5. 14)
- 爆彈襲擊을 企劃한 不逞鮮人 檢擧에 關한 件(1920. 2. 25)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66~26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