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1922년 국내에 진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에도 굴하지 않고 재기한 남북 만주 각지의 독립군들은 1921년 이후 새로운 전략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종전처럼 각 지역별로 분산되고 그 이념마저도 분리되어서는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22년 2월에 이르러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였다.
그 결과 1922년 2월에 이르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이처럼 오태봉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을 때 군자금의 마련을 위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1922년 3월 6일부터 7일까지 양일간 평북 창성군(昌城郡) 창성면(昌城面) 평로동(坪路洞)에서 김사언(金士彦) 외 10명에게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면 운평동(雲坪洞) 강종호(康宗湖)외 7명에게도 역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이를 거부하던 평로동 명재형(明在亨)을 사살하였고, 운평동 강윤서(康允瑞)와 그의 딸에게 중상을 입히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창성서장(昌城署長) 등 일경 11명이 국경을 넘어 추격하여 1922년 3월 10일 관전현(寬甸縣) 고자구(高子溝)에서 전투를 벌인 결과 동지 이시언(李時彦)은 체포되고 오태봉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948·963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