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1923년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에도 굴하지 않고 재기한 남북 만주 각지의 독립군들은 1921년 이후 새로운 전략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종전처럼 각 지역별로 분산되고 그 이념마저도 분리되어서는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22년 2월에 이르러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22년 2월에 이르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대한통군부가 성립된지 얼마 안되어서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된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어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곧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리되었다.
이처럼 경신참변 이후 독립운동단체들의 재정비가 이루어질 무렵인 1923년, 장재명은 독립군에 입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만주지역에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군과 마적 등 그 지역의 토착세력들이 돈을 제공하겠다는 일제의 유혹에 이끌리어 한인들을 납치 또는 살해하는 경우 등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들은 재만동포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활동 중 토군들과 충돌하는 사태들이 일어났다. 장재명은 이 때인 1924년경 중국 토병(土兵)과 충돌하여 29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신문(1925. 5. 5)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3권 809·811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