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0153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元國
이명 金昌林, 金昌植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1919년 3ㆍ1운동 후에 중국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1925년 경부터 남만(南滿)에서 정의부(正義府) 6중대 2소대장으로 있으면서 1926.9.8 통화현(通化縣) 쾌대모자(快大帽子) 등지에서 친일파 신한철(申漢哲) 등을 사살하고 친일단체인 상조계(相助契)를 토벌한 후 1926.9.14 대원 서상진(徐尙眞).김용호(金龍浩).심영준(沈永俊) 등과 함께 중국 (警)((保))갑대(甲隊)에 체포되어 1927.3.9 대련지방법원(大連地方法院)에서 사형(死刑)을 받고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1919년 3·1운동 이후에 중국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5년부터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 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조직을 완료하였다. 또한 정의부를 끌고 나갈 분과위원도 선임하였는데, 자치분과위원 이진산·맹철호(孟喆鎬)·최명수(崔明洙), 군사분과위원 이장녕(李章寧)·조성환(曺成煥)·김 철(金鐵), 교육분과위원 이창범(李昌範)·고활신(高豁信)·김동삼(金東三), 재정분과위원 김 호(金虎)·윤덕보·승 진(承震), 생계분과위원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백남준(白南俊) 등이었다. 아울러 부령(府令)으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紀元年號), 공농제도(公農制度), 행정위원회 규칙, 칭호법, 기관보 및 교과서 발간, 행정위원회 결의사항 등을 공포하였다. 김원국이 활동한 정의부는 중앙본부를 처음에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두고 참의부(參議府)의 세력권인 관전현(寬甸縣)·집안현(輯安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 정의부는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서 화전(樺甸), 길림(吉林)의 신안둔(新安屯), 반석(磐石)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吉林省)에 살고 있는 한인 1만 7천여 호, 8만 7천 명을 관할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조직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자치활동에, 1926년 초 군민대표회의가 조직되어 무장파가 득세하였을 때는 군사활동을, 1926년 말 다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을 때부터 1929년 3월 해체될 때까지는 자치활동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 김원국이 참여한 정의부는 조직 당시부터 자치활동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므로 정의부에서는 실업증진, 교육·선전활동, 재정기반의 확대 등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정의부의 식산흥업 부분에 대하여 알아보면, 정의부는 흥업실업사를 설립하여 경농과 정미업을 개시하였고, 중국 당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동포의 농사자금 마련과 농사의 지도, 장려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농민조합과 같은 민간단체인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도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각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중등교육을 위하여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에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유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 길림성 화전현 성내(城內)에 화성의숙(華成義塾), 유하현 왕청문에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의부의 이러한 교육은 중국동북정권이 신교육령을 제정 반포하여 재만한인들에게 중국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의부에서는 선전활동을 위하여 잡지와 신문도 간행하여 재만동포의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6년 9월에는 선전기관으로서 대동민보사를 설치하고 정의부의 기관지로서 「대동민보(大東民報)」를, 1926년 9월 15일부터 발행하였다. 아울러 정의부에서는 대동민보사 발행으로 1927년 1월 1일부터 『젼우』라는 국한문 혼용의 잡지도 간행하였다.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령관 아래 중대와 소대를 두었다. 이들 군사부는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 또는 대한제국 군대 출신의 김창환(金昌煥), 그리고 오동진 등의 지휘를 받았으며, 정이형(鄭伊衡)·문학빈(文學彬)·양세봉(梁世奉) 등 평안도 출신들이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김원국도 참여한 정의부의 군대활동은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활동, 독립선전공작, 주구 암살, 일본 관리의 사살, 적기관 방화공작 등이었다. 한편 정의부는 부내의 모든 장정에 대하여 의무병제를 실시하였으며, 상비군으로서는 8개 중대와 민경대(民警隊)를 두었고, 1927년에는 7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과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립하여 모든 장정과 재향군인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 남만주지역에서 활발히 대일투쟁을 전개하던 정의부에서 김원국은 1925년에는 의용군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활동하면서 통화현(通化縣) 쾌대모자(快大帽子)에서 친일파 신한철(申漢哲)을 사살하고, 친일단체인 상조계(相助契)를 토벌한 후, 1926년 9월 14일 대원 서상진(徐尙眞)·김용호(金龍浩)·심영준(沈永俊) 등과 함께 중국 보갑대(保甲隊)에 체포되었다. 김원국은 1927년 3월 9일 중국 대련(大連)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고, 1928년 11월 9일 여순(旅順)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308․415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82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3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22․929․930면
  • 동아일보(1926. 11. 27, 1927. 3. 12, 1928. 11. 2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원국 김창림(金昌林), 김창식(金昌植) 평안북도 벽동(碧潼) -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와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원국(관리번호:70153)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