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1915년 만주로 망명하여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24년 3월 상순에는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정의부(正義府) 교양부 집행위원장 김용대(金容大)의 권유로 정의부에 가입하였다. 그가 가입하여 활동하던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되자 곧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아울러 중앙행정위원으로 이 탁·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김이대(金履大)·윤덕보(尹德甫)·김용대(金容大)·이진산(李震山)·김형식(金衡植)·이청천(李靑天) 등을 선임하여 정의부 조직을 완료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조직 이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자치활동에, 1926년 초 군민대표회의가 조직되어 무장파가 득세하였을 때는 군사활동을, 1926년 말 다시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을 때부터 1929년 3월 해체될 때까지는 자치활동에 좀더 비중을 두었다. 김준택이 참여한 정의부는 조직 당시부터 자치활동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므로 정의부에서는 실업증진, 교육·선전활동, 재정기반의 확대 등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정의부의 식산흥업 부분에 대하여 알아보면, 정의부는 흥업실업사를 설립하여 경농과 정미업을 개시하였고, 중국 당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동포의 농사자금 마련과 농사의 지도, 장려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농민조합과 같은 민간단체인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의부는 교육에 있어서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각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중등교육을 위하여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에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유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 길림성 화전현 성내(城內)에 화성의숙(華成義塾), 유하현 왕청문에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의부의 이러한 교육은 중국동북정권이 신교육령을 제정 반포하여 재만한인들에게 중국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김준택은 이처럼 활동적인 정의부에서 동부 경영의 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 1928년에는 중앙집행위원 및 외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3월에는 국민부가 조직되자 외무집행위원에 취임하였다. 국민부는 1930년대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는 1928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있었던 3부통합회의가 실패한 후, 동년 12월 신민부(新民府) 군정파(軍政派)와 정의부 탈퇴인사, 그리고 참의부(參議府) 주류세력들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자,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참의부 심용준파(沈龍俊派), 신민부 민정파(民政派)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29년 3월부터 새로운 군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회의를 길림성(吉林省)에서 개최하고, 1929년 4월 1일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해체를 선언하고, 새로이 조직한 단체이다. 국민부에서는 1929년 5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을 결정하였는데, 당시 선임된 간부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 민사위원장 김이대(金履大), 경제위원장 장승언(張承彦), 외교위원장 최동오(崔東旿), 군사위원장 이 웅(李雄), 교육위원장 고이허(高而虛), 법무위원장 현정경(玄正卿), 교통위원장 김 돈(金敦), 중앙집행위원 김진호(金鎭浩)·심용준·이일세(李一世)·이동림(李東林)·황기룡(黃起龍)·고활신(高豁信), 사령관 이 웅, 1중대장 양세봉(梁世奉), 2중대장 윤 환(尹桓), 3중대장 이태형(李泰馨), 4중대장 김창헌(金昌憲), 5중대장 장철호(張喆鎬), 6중대장 안 홍(安鴻), 7중대장 차용륙(車龍陸), 8중대장 김보국(金保國), 중앙호위대장 문시영(文時映) 등이었다. 동년 11월에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조직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후 민족진영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다. 1929년 12월에 창당된 이 정당은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이 발전하여 이룩된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기본 임무는 민족적 대당을 형성하여 혁명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당면 과업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지도 육성하는 일이었다. 이 조선혁명당의 주요 간부로는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 정치부 위원장 현정경, 조직부위원장 고이허, 경제부 위원장 장승언, 외교부 위원장 최동오(崔東旿), 선전부 위원장 고활신, 군사부 위원장 이 웅 등이었는데 김준택은 여기서 교양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준택은 그 후 조선혁명당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취임하여 군사위원회 위원 겸 자치위원회 위원으로 일하였다. 또한 1931년 8월 17일에는 재차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군사위원회 위원과 자치위원회 위원으로 군사위원회에 속하여 조선혁명군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그 후 1931년 12월 흥경현(興京縣)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5년 10월 22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2. 11. 21 신의주지방법원)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416․41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3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13면
- 동아일보(1932. 11. 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