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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975
성명
한자 李仁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1935년 조선변호사협회장(朝鮮辯護士協會長)이었으며 많은 독립투사(獨立鬪士)무료 변호(無料辯護)하므로서 옹호(擁護)했다.
2.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함흥감옥(咸興監獄)에서 옥고(獄苦)를 겪다
3. 8.15 광복후(光復後) 대법관(大法官), 검찰총장(檢察總長), 법무부 장관(法務部長官), 제헌 3대 민의원(制憲三代民議員)피선(被選)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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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북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본 명치(明治)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서 1935년에 조선변호사회(朝鮮辯護士會) 회장을 지냈으며 광주학생운동 등에서 많은 독립투사를 무료 변호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 조선어학회의 전신)의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간행에 재정지원을 했으며, 1935년에는 이우식(李祐植)·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사전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또한 1935년에는 조선기념도서출판관(朝鮮紀念圖書出版館)을 조직하여 그 제1차사업으로 부친의 회갑을 기념하는 도서로서 김윤경(金允經)의 『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를 간행하여 민족출판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의 보급과 한글의 출판관계를 일체 금지하고 한글학자들과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3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대법관,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제헌의회와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건국에 기여하였다. 만년에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여 재정지원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21·490·1444면
  • 고등경찰요사 4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45면
  • 기려수필 361·365·367·371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5권 25·26·2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2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89·5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01·502·1002·1003·1004·1005·1011·1015·101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16·4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53·7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274·2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44·52·96·106·141·189·256·14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358·362·367·57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인 자 : 자옥(子玉), 호 : 애산(愛山) 경북 대구(大邱) 조선어학회 사건
본문
1896년 9월 20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동상면(東上面, 지금의 중구 동성동)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자옥(子玉)이고, 호는 애산(愛山)이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한문 공부를 계속하다가, 1904년부터 신돌석 의병장의 참모로 활동하였던 김수농(金睡儂)이 세운 달동의숙(達東義塾)에 입학하여 4년간 학업에 전념하였다. 스승으로부터 역사·지리·세계사·수학 과목 뿐만 아니라, 총 사용법까지 익혔다. 수업시간에 스승을 통해 강렬한 민족혼을 전수받았다. 그 뒤 경북실업보습학교 2년을 마친 뒤 1912년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3년에는 세이소쿠중학(正則中學)을 다녔고, 1914년 니혼대학(日本大學)의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1917년 1월 졸업하였다. 1916년 3월 니혼대학 고등 전공과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졸업하였다. 다시 1916년 11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 2학년에 편입하여 1918년 7월 졸업하였다. 법률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은 동기는 억울한 우리 민족을 구해보자는 의분(義憤)과 어떻게 해서든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자는 생각에서 비롯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서민호(徐珉濠)도 만났다. 1923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그해 5월 개업하였고, 7월에 의열단 사건을 맡았다. 이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련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변론을 맡았으며, 허다한 무료변론 뿐만 아니라 음식과 의복까지 차입시켜 주었다. 이후 20년간 매년 50~60여건, 그 가운데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상사건만 총 1,000여 건을 변론하였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 가운데 특히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인 오동진(吳東振),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이응서(李應瑞),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역임한 안창호(安昌浩) 등의 변론을 맡았다. 또한 고려혁명당 사건, 수원고농 흥농사 사건, 광주학생운동, 창원 소작쟁의 사건, 원산총파업 사건, 형평사 사건 등을 변론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 관련 항일 변론으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1927년 12월 고려혁명당 사건 변론에서 “일본이 동양평화라는 미명하에 한국을 합병하였으나, 일본의 조선 식민정책은 양두구육(羊頭狗肉)과 흡사하다”라고 말하자, 일본인 재판장은 변론을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유학 중인 김법린(金法麟)에게 여비로 쓸 200달러를 몰래 보내주어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게 해 주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변론 때에는 학생들에게 “이 정신 이 기백을 길이길이 잊지 맙시다”라고 격려하여 일본인 형무관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1930년 5월 수원고농학생들의 흥농사 사건을 변론할 때에는 “일본이 한민족을 노예시하고 차별하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 양부모(일본인)의 학대에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양자(학생)는 친부모(한국인)를 그리워 할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굶주리면 먹을 것을 찾게 되고 결박당하였을 때는 자유와 독립·해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양심적 발로이고 역사적 필연이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이 변론을 미우라(三浦)라는 일본인 검사가 문제를 삼아 구속하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으로부터 6개월간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았다. 그 결과 ‘사상변호사’라는 칭호까지 생겨났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1935년경 이극로(李克魯)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 후원회에 장현식(張鉉植)·이우식(李祐植)·민영욱(閔泳旭)·김양수·김도연·서민호·신윤국(申允局·임혁규(任爀奎)·김종철(金鍾喆)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에 후원한 임혁규가 남긴 자료에 의하면 1937년과 1938년에 각 100원씩을 조선어사전 편찬기금으로 납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종결 결정문에 의하면 1939년과 1940년에도 도합 200원을 사전편찬기금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지원은 조선어학회가 ‘말’과 ‘글’과 ‘얼’을 되찾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인식한데서 비롯되었다. 1935년 3월 이극로의 구상으로 출현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 감사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조선기념도서출판관(朝鮮紀念圖書出版舘)은 가난한 한국의 학자들이 출판비가 없어 민족문화를 향상시키는 좋은 책을 내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아울러 1937년 이극로가 추진하던 양사원(養士院) 건립 계획에 이우식·안호상(安浩相)과 함께 찬동하여 참여하였다. 양사원은 다가올 독립국가에서 활용할 인재를 미리 양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조직한 학술연구기관이었다. 앞장서서 양사원 설립 인가를 얻고자 하였으나, 끝내 일제로부터 허가를 얻지 못하였다. 1938년 1월에는 부친의 회갑 축하비용 1,200원을 이극로에게 제공하여,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서 김윤경의 저작 『조선문자급어학사』 1,000부를 출판하도록 지원하였다. 이러한 활동 등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942년 11월 10일 서울 자택에서 붙잡혔다.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인사 체포된 33인과 함께 함흥경찰서 유치장과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조사과정에서 조선어사전 편찬 후원과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도서출판을 지원한 점, 그리고 양사원 건립을 협의한 활동이 드러나 1945년 1월 16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풀려난 뒤에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은봉면 덕정리에 있는 농막에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독립국가에서 사용할 국호와 국기와 국화를 구상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미군정시기에는 특별범죄심사위원장 겸 재판장, 수석대법관, 대법원장 서리, 헌법기술위원회 부위원장, 검찰총장, 국학대학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닦는데 기여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 초대 법무부장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국회의원, 헌법위원, 한글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초대 정부 조각 구성 때는 김병로(金炳魯)를 대법원장으로 추천하여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시위학생 1,000여 명을 집에 숨겨주었고, 총에 맞아 부상당한 40여 명에게 응급 치료를 해주어 ‘학생의 부모’라는 존칭까지 받았다. 같은 해 4월 20일 김병로·서상일(徐相日) 등 13인과 함께 이승만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68명과 같이 이승만의 하야와 체포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냈다. 1964년 7월 함석헌(咸錫憲)·김홍일(金弘壹) 등과 함께 한일협정의 시정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6년 9월 함석헌·김홍일·신숙(申肅) 등과 함께 부패한 관료와 악덕재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976년 2월에는 건국대학교로부터 일제시기의 변론 활동과 해방 후 건국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8월 15일 효자동 집을 팔아 마련한 3,000만원을 한글학회 회관 건립 기금으로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2억원의 모금운동을 벌여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지금의 한글학회 회관을 지을 수 있었다. 1979년 작고하기 전에는 11,000,000원 달하는 강남구 논현동 소재의 2층집도 한글학회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겨, 장남 이옥이 1979년 7월 기증식을 통해 전달하였다. 저서로는 『반세기의 증언』, 『애산여적』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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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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