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72
성명
한자 李重立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3.1 운동 당시안성(安城), 원곡(元谷), 양성(陽城) 만세사건에 가담하여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등을 습격 기물을 파괴하고 방화등으로 2년 6개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안성(安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양성면(陽城面)·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처음에는 양상면과 원곡면이 별도로 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최은식·홍창섭 등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하고, 양성면내에 있는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로 구성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게 되어, 시위군중은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워 버렸다. 다시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 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파괴하였다. 다음은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되돌아 온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75∼1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422∼48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중립 李銀京 경기도 안성(安城) 1919년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만세운동
본문
1882년 5월 1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외가천리(外加川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은경(銀京)이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 발생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전개된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연합 만세시위는 원곡면 칠곡리(七谷里)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이 만세운동은 일제가 그 만세시위의 참여자들에게 내란죄(內亂罪)를 적용하려고 시도할 만큼 매우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연합만세시위는 원곡면에서 시작되었다. 4월 1일 오후, 최은식과 이근수 등으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받고, 원곡면의 각 마을에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원곡면사무소 앞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유석·최은식·이양섭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가장 먼저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최은식과 함께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였다. 최창용(崔昌鎔)·홍재의(洪在義)·최문섭(崔文燮) 등과 함께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주변의 다른 주민들에게도 경찰주재소 공격을 독려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만세시위대가 우편소로 향하자,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우편소를 향에 돌을 던졌다. 양성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상인 소토 사토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 집에 대한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 가구들을 파괴하였다.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원곡면으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일제는 4월 3일 원곡, 양성 지역으로 한국 주둔 일본육군 제79연대 소속 약 30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른바 내란죄의 혐의로 고등법원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주거침입, 강도, 소요, 전신법위반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1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건조물소훼, 소요 징역 2년 6월, 다만 구류일수중 500일을 본형에 산입함 경성복심법원 1921-01-2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기념관 안성 3·1운동 기념관 경기도 안성시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이중립(관리번호:672)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